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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May 13. 2024

낯선 사람을 따라서

그녀는 누구일까

할 일 없이 집 앞을 어슬렁거리다 국민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집에서 오른편으로 가다 갈래길에서 다시 오른쪽 골목을 쭉 따라가면 학교 후문이 나왔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가끔씩 외부에서 주관하는 레슬링 대회가 열리곤 했는데, 몇 달 전에 멋모르고 혼자 인파 속으로 들어갔다가 사람들한테 깔릴 뻔한 적이 있었다. 아저씨들이 나를 들어 올려 겨우 밖으로 내보내 주었 기억이 아직은 생했다.


철봉에 잠시 매달렸다가 운동장이 휑해서 다시 집으로 가려는데 먼발치서 어떤 젊은 여자가 손을 흔들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 누가 있나 싶어 뒤돌아 보니, 보이는 건 나의 그림자뿐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점점 더 선명하게 윤곽을 드러냈.

까맣고 윤이 나는 생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고, 머릿결이 어찌나 고운지 물미역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동네에서는 본 적이 없는 외모였다. 그녀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정아 맞지? 언니 기억 안 나? 미선이 언니잖아, 고모 딸."

그녀는 "언니랑 집에 가자."며 내게 과자 봉투를 쥐여 주었다.


순간, 모르는 사람은 절대 따라가지 말라시던 엄마의 말씀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쁜 사람일 가능성이 없지 않았다. 나는 본 적이 없는데 고모 딸 행세를 하고 있고 아주 상냥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과자를 미끼로 유인한다는 점에서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손을 잡고 쭐레쭐레 걸어가고 있었다. 길고 찰랑찰랑한 머리에서 익숙한 꽃향기가 나 꽃밭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그녀의 정체보다 과자의 정체가 더 궁금했다. 이 봉투 안에 어떤 과자가 들어 있으려나. 이왕이면 뽀빠이가 들어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왕 뽀빠이가 들어 있을 거 봉지 끄트머리에 특정 표시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이것을 발견하면 보너스'한 봉지 더'라고 작은오빠가 가르쳐 주었었다. 여태 안 나온 걸로 봐서 확률상 이제 한 번쯤 나올 때도 된 것 같았다. 옆 동네 아무개 씨가 한 봉지 더 받았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지만 코 묻은 우리들의 손에까지 오기란 여간 힘든 게임이 아니었다.


그나저나 그녀는 내 손은 놓아주지도 않고 빠른 속도로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걱정은 좀 되었지만 도망칠 마음은 딱히 없었다. 가다 보니 우리집 근처까지 왔다. 나는 심지어 집 앞인데도 탈출 시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집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 것은 그녀였다.


"외숙모, 정아 데리고 왔어요!"


외숙모는 누구인가? 왜 우리 엄마가 걸어 나오는가?

"엄마가 낯선 사람 따라가지 말라고 했다구선 잘만 따라오네요, 호호호."

나는 본 기억이 안 났지만 그녀는 고모 딸, 미선이 언니가 맞았다. 우리집에는 처음 온 것이었는데 내가 없어서 나를 찾아 학교로 데리러 간 거였다. 나는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나쁜 사람이었다면 큰일 날 뻔했지만 억세게 운이 좋았다.




엄마는 밥상을 내오셨다. 차린 것은 많지 않았지만 먼길 온 손님에게 따뜻한 밥 한끼 대접하는 것이 우리네 정이었다.


나는 언니에게서 시선을 못 뗐다. 짧은 시간 동안 급격히 친해진 것도 있지만 언니의 머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언니는 나에게 머리를 맡겼다. 나는 참빗으로 곱게 빗었다가 땋아 보기도 하고, 다시 풀고 양 갈래로 묶어 보기도 하며 전에 없던 놀잇감에 푹 빠졌다. 엄마는 언니 좀 버려두라고 하셨지만 언니는 웃으며 정말 괜찮다고 놀게 놔두라고 했다. 엄마는 과일 등을 가지러 부엌에 왔다 갔다 하셨다.


그런데 내 손을 탄 머릿결이 조금은 푸석해진 모양새였다. 처음에 본 물미역에서 다소 마른미역 느낌이 났다. 뭔가 조치가 필요해 보였다. 그때, 이디어 하나가 번뜩였다.

"스윽."

"스르릅."

침을 좀 발랐더니 윤기가 되살아나는 것이었다. 천연 성분의 젤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눈치를 채고는 흠칫했다.

", 정아 뭐 바르? 침 바르나?"

나는 대답대신 멋쩍게 웃고만 있었다. 엄마가 들어오다가 들셨다.

", 정아, 언니 머리에 침 바르면 안 돼!"

언니는 오히려 손사래 쳤다.

"아니에요, 외숙모. 괜찮아요. 애들인데 뭐가 어때요."

그렇지만 엄마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계셨다.

'너를 지켜보고 다.'


예쁘고 상냥하고 머리에 침을 발라도 화내지 않는 언니. 나는 언니에게 내 마음을 뺏겼다. 하지만 언니는 그 후로 한 번도 우리집에 온 적이 없었다. 그것은 내 침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른 나이에 서울보다도 더 멀리 시집을 갔기 때문이었다. 대략 15년 전쯤에 친척 결혼식에서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웃으며 내 손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오호, 어릴 때 내 머리에 침 바르고 놀던 애가 많이 컸다, 너.'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상냥하고 손이 따숩던 언니는 딸들과 남편 속에서 행복해 보였다.


꽃향기가 날아올 때마다 어린 내 눈앞엔 언니의 머리칼이 아른거렸다.

'미선이 언니, 우리집에 언제 올 거야? 내가 또 예쁘게 해 께, 히히.'

나는 언제든지 언니가 오면 반짝반짝 윤이 나는 물미역 헤어로 만들어 줄, 천연 재료  있던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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