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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May 27. 2024

여동생에게 오빠란

어깨동무하며 걷는 자

내가 여섯 살 때 큰오빠는 국민학교 3학년, 작은오빠는 2학년이었다.

나는 비교적 얌전한 아이였지만 오빠들과 함께 있으면 기가 살아났다. 오빠들을 졸졸 따라다니며 놀다 보면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질긴 억새풀이 되어 갔다.

 

"쉭쉭"

작은오빠가 뱀 소리를 낸다는 것은 권투 스파링 상대를 물색 중이라는 뜻이었다. 큰오빠가 집에 없으면 그 상대는 내가 된다. 나는 일단 수락하고 봤다. 두 팔을 몸에 붙이고 구부정하게 있는 모습이 다소 왜소해 보여 해볼 만했다. 하지만 오빠 주먹이 내 얼굴 앞까지 올 때, 내 팔은 다 뻗어 봐야 반 밖에 못 갔다. 팔이 짧은 건 권투에서 엄청난 핸디캡이다. 직접 닿지는 않아도 얼굴 앞에서 주먹이 알짱거리는 것은 정말 약오른다.

"나 안 해."

내가 거부권을 행사하면 오빠는 종목을 바꿨다. 허리춤을 잡고 넘기는 시늉을 했다. 이건 더 말이 안 된다. 백두급과 태백급이 씨름을 하는 게 어디 있다고.

"나 안 해."


인형놀이가 내 적성에 맞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빠들은 인형놀이를 안 했다. 인형놀이 대신 오빠들의 취향대로 따라가는 건 어찌 보면 생존을 위한 진화 과정이다. 집에 있는 인형은 책상 서랍 안에서 1년 365일 잠만 잤다. 세우면 눈을 뜨고 눕히면 감는 인형이었다.


오락실도 따라다녔다. 오빠들이 아니었으면 문턱을 넘을 일이 없었겠지만 내 집처럼 자연스럽게 드나들었다. 우리 동네는 전자식이 아닌 기계 오락실이었는데 나는 특히 자동차 경주를 좋아했다. 기계 속 그림 위에 장난감 자동차가 놓여 있었고 핸들을 돌리면서, 다가오는 차와 장애물을 피하는 게임이었다. 직접 오락을 할 줄은 몰랐지만 발을 동동 구르며 오빠들을 응원했다. 때로는 동전 하나 달랑 들고 가서는 남이 하는 것까지 구경하다 보면 귀가가 늦어져서 엄마께 야을 맞기도 했다.


오빠 껌딱지 생활이란 것은 녹록지만은 않다. 결국 일이 터졌다.

우리집 근처에는 작은 도랑이 있었다. 깊이는 내 키보다 얕고, 물이 자갈돌 사이로 졸졸 흐르는 도랑이었다.

어느 날 작은오빠와 어깨동무를 하고 도랑가를 걸어가는데, 곧게 난 길이 재미없었는지 오빠는 지그재그로 움직였다. 나 역시 내 자유 의지와 다르게 덩달아 갈지자로 가야만 했다. 그런데 오빠가 "어어어" 하며 힘을 주어 밀기 시작했다. 뭔가 위태위태하다 생각했는데 도랑 쪽에서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나를 확 밀어버렸다. 어깨동무로 엮인 둘은 함께 도랑에 처박혔다. 나는 돌부리에다가 오른쪽 눈썹 근처 미간을 찧었다. 오빠는 내가 쿠션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내게 무게만을 더해주고 본인은 무사했다.


"으앙 으앙 으아아앙"


피가 나고 난리도 아니었다. 아니 여섯 살 고운 얼굴에 이 무슨 짓이요!

지금 같으면 애 얼굴에 흉 생길까 응급실로 직행했겠지만 큰 상처는 아니었기에 엄마는 상비약 통에서 하얀 지혈가루를 꺼내 묻혀주시고 빨간약을 정성스럽게 발라 주셨다.


그날 이후 내 미간에는 쌀알 반개 크기의 파인 흉터가 생겨 평생을 따라다닌다. 세수를 할 때, 화장품을 바를 때 평평해지라고 주문을 외우며 항상 꾹꾹 눌러 준다. 미의 오점이자 평생의 수고로움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피부과 시술로 해결할 수도 있겠으나 한창 이쁠 나이도 아닌데 싶다.


그 당시 TV 광고에는 이런 멘트가 있었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모 제약회사의 영양제 광고였다.

오빠에게 잘못이 있다면 개구쟁이였다는 것. 그러나 튼튼하게 자라 주었으니 용서를 해 줄 수밖에 없다는 것.

오빠는 내 흉터를 모른다. 내가 한 번도 말을 안 꺼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지 않던가. 나도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오빠들의 존재는 내 가벼운 흉터에 비하면 예나 지금이나 묵직하다. 동기들이 없었다면 그 자리를 무엇이 대신했으려나. 하늘이 내려 준 선물이다. 그리고 세상 누구에게나 어떤 모습으로든 선물은 주어진다. 어떤 의미 부여하느냐가 중요하다.

때로는 성가시고 때로는 얄미웠어도 나는 든든했고 심심할 새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 추억의 한 편을 함께 만들어 갔다.



"여동생들아,
개구쟁이 오빠들을 주목하여라.
그들은 생각보다 더 개구쟁이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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