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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Jun 03. 2024

이웃나라 공주의 출현

행복의 날갯짓

며칠 내리던 비가 그치고 햇빛이 빤해진 날, 오랜만에 동네 공터로 마실을 나갔다. 국민학교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없는 시간이어서 한산했다.


그날따라 평소에는 굳게 닫혀 있던 대문 하나가 이례적으로 활짝 열려 있었고, 못 보던 몇몇 어린아이들이 대문 밖에서 쪼그리고 앉아 놀고 있었다. 그중에서 내 또래인 듯한 여자 아이가 바닥에 고인 빗물을 장난감으로 퍼 담고 있었고, 옆에는 동생들로 보이는 여자애, 남자애가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는 근거리에서 보고 있는데도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개 숙여 빗물놀이에만 중했다.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이 바람결에 떨어졌던 걸까. 그 친구는 손바닥을 내밀며 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때였다. 친구의 얼굴이 햇살에 드러나며 어디선가 파란 이온음료 광고에 나올 법한 상큼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샤라라라라라 라 라~'


그것은 나에게 컬쳐 쇼크였다.

머리를 곱게 양 갈래로 땋고 멜빵치마를 입고 있 그녀는 뽀얀 피부, 긴 속눈썹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린아이에게서 어떻게 그런 우아한 몸짓이 나올 수 있는지, 세련되지 않은 여섯 살안목으로 봐도 한 마리 학처럼 고고함이 느껴졌다. 

첨탑 종소리가 울릴 시간이 아님에도 어디서 댕댕댕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만약 소년이 소녀를 만난 것이라면 사랑에 빠지는 순간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다. 그 친구는 나긋한 말투로 동생들얘기를 하고 있었고 내가 투명인간이도 되는지 내 쪽으로는 눈길 한번 안 주었다.

말을 걸어 보고 싶었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 다른 차원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여봐요, 나 보여? 이거 몇 개예요?'

······

'여봐요, 름은 좀 해요? 물 놀이도 좋지만 국민학생이 되려면 튼튼해 된다구요.'

마음만 굴뚝같을 뿐, 차원이 다른 두 세계는 좀처럼 섞이기 힘들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엄마께 머리를 양 갈래로 땋아 달라고 부탁드렸다. 엄마는 지금도 잘 묶여졌다 하시면서도 다시 양 갈래로 땋아 주셨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온 오빠가 물었다.

"정아 오늘 나갈 거야?"

나는 우아하게 방바닥만 쳐다보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엄마, 정아 야단맞았어요?" 

"아닌데, 왜?" 

나는 오빠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장판의 올록볼록한 양각 무늬만 만지작거렸다. 안 살아 본 삶을 흉내 낸다는 건 참 생경스럽다.


며칠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엄마와 목욕탕에 갔을 친구를 다시 만났다.

친구는 물길을 따라 내려가는 오수를 비누 뚜껑에 퍼 담고 있었다. 한결같구나, 물 좋아하는 건.

나는 또 그 옆에 서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경을 했고, 역시나 투명인간이었다.

'여봐요, 그 물은 더럽잖아요. 위험해요, 엄마로부터 등짝스매싱이 날아올 수도 있다구요!'

친구의 거침없는 행보를 나는 뜨악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정아, 때 밀자."

엄마가 부르셨다. 그 친구 보느라고 미리 때를 불려 놓지 않아서 아플 것이었다. 생각만 해도 오금이 저렸다.

엄마가 타을 집어 드셨다.

"아 아파요, 살살."

"아직 손 대지도 않았다."

파란 이태리타은 보고만 있어도 몸 전율이 왔다.

엄마와의 주고받는 밀당 속에 그 친구와는 그렇게 흐지부지 헤어졌다.




그 후 그 친구는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더 이상 마주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문은 바람 따라 어디든 날아가는 법. 얼굴도 예쁘면서 공부도 매우 잘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중고등학교 때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공부를 잘하려면 옆에서 벼락이 떨어져도 모를 만큼 집중을 해야 된다고 하셨는데, 그 친구야말로 내가 옆에  있는 것도 개의치 않고 제 일에만 열중하던 애였으니 이미 될성부른 떡잎이 아니었나 싶다.


어린 마음에 나와 다른 새로운 세계를 동경하게 만든 아이. 만남이 영화 속의 장면인 착각하게 만든 마법의 소녀. 강산이 번이나 바뀌었는데도 어제 듯한 생생함이 경이롭기만 하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나비처럼 살포시 앉아 선한 날갯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

친절이나 아름다움, 따스한 말과 글.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의 나비들은 우리 마음속에 날아들었다가 다시 우리 삶 속으로, 행복한 나비효과를 일으킨다.

그 친구와의 기억이 이 글을 쓰며 즐거워하는 나를 만들고, 또한 이 글을 읽으며 잠시 자신의 나비를 찾아 떠나는 누군가의 즐거운 여행을 만들 수도 있는 것처럼.

우리 삶에 깃털 같은 행복이라도 그것이 수없이 날아들고 날아간다면, 어쩌면 우리는 우울하고 불행할 틈이 없어질지도 모른다.

오고가는 날갯짓이 많아지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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