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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Jun 10. 2024

달이 자꾸 따라와요

지구 구할 뻔한 이야기

달밤

           조 지 훈


순이가 달아나면

기인 담장 위으로

달님이 따라오고


분이가 달아나면

기인 담장 밑으로

달님이 따라가고


하늘에 달이야 하나인데


순이는 달님을 데리고

집으로 가고


분이도 달님을 데리고

집으로 가고



중학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달밤'이라는 시다.

이 시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여섯 살 때의 기억 한 편을 소환하며 피식하고 웃었다. 내가 자칫 인류를 구원할 뻔했던 웅장한 이야기다.


주말에 내려놓았던 이야기 봇짐을 다시 둘러메고 가던 길을 떠나 본다.




우리가 새로 이사 간 셋집은 단칸방이었지만 방문 앞에 툇마루가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주인집 딸이 나와 동갑내기였고 매우 착하다는 것이었다.

그 동네에는 골목마다 또래 아이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그중 국민학생 언니 한 명의 진두지휘로 조무래기들이 우르르 몰려다녔다. 그 언니는 똑소리 나는, 쿨하고 시크한 언니였다.


어느 날 저녁 식사 , 마당이 넓은 어느 집에 몰려가 숨바꼭질을 하고 놀았다. 나는 빨랫줄에 널려 있는 큰 이불속에 숨어 있었는데 나와 보니 아이들이 없어 혼자 집으로 가고 있었다.

하늘을 보았다. 크고 둥근달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나를 지긋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우리집에 가 보니 언니와 언니 동생, 주인집 딸 영신이가 놀고 있었다.

"너 어디 갔었어?"  

"나 이불 속에."

우리는 주워 모은 돌로 공기놀이도 하고 쌓기놀이도 했다.

돌을 받으려고 위로 던져 올리다가 나는 달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까 분명 길에 있었던 달인데 우리집 마당에 와 있는 거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뒷모습도 옆모습도 아닌, 그 무늬 그 각도 그대로 내려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의도적으로 주시하고 있는 듯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공기놀이를 한참 하다가 혼자 뒷간에 갔다. 볼일을 보고 문을 나서는데

에구머니나.

하다 하다 거기까지 따라와 있었다.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당을 지나 골목으로 가 보니 어김없이 따라와 있었다. 나는 쏜살 같이 우리 방으로 들어와 버렸다.

제발 가라, 제발 가라.

기다렸다가 문을 빼꼼히 열어 보았다. 문 틈으로 우리 방을 보고 있는 달을 기어이 보고 말았다.


나는 너무 무섭고, 두렵고, 울고만 싶었다.

그러니까 저 달이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나만 졸졸 따라다니냔 말이다. 나와 달은 태생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다. 나는 보통의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특별하고 유일한 존재였던 것이다.


지난 일들을 되돌아보니 퍼즐이 맞춰졌다.

잠겨 있던 캐비닛을 내가 열었을 때 엄마는 소스라치게 놀라셨다. 이걸 어떻게 했어? 사실 엄마가 매일 오른쪽으로 세 번, 왼쪽으로 두 번 돌리시길래 따라 해 봤을 뿐이었지만. 그것을 포착한 것은 놀라운 능력이었던 걸까?

외할머니댁 가는 시외버스 안에서 어떤 젊은 여자분이 내게 목각인형 세트를 준 적이 있었다.

"니가 예뻐서 주는 거야."

나는 순진해도 너무 순진했다. 예쁜 친구들은 많아도 목각인형 받은 애를 본 적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계획 하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는 평생 연구실에서 실험을 하며 박사로 지내야 할지 모른다. 아니면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큰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 아빠는 이 비밀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신다면, 지금껏 비밀로 해온 것을 내가 알게 돼서 슬프실 것이다. 반대로, 모르고 계신다면 내 입으로 이 슬픈 비밀을 말해야 하는 것인가.

"난 못해."

난 엄마 아빠와 헤어지기 싫고, 난 그냥 공기놀이, 숨바꼭질을 하며 지금처럼 재밌게 살고 싶은데.

하지만 그러기엔 하늘에서 달이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 버린 것이다.


부엌에 계시는 엄마께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너무 힘들어 마당에 있는 언니에게 갔다.

그래, 언니에게라도 털어놔야지, 이 답답한 마음을, 이 운명의 장난을...


"언니, 나 비밀이 있어."

언니가 무심히 휙 쳐다봤다.

"나 사실, 대단한 사람이야."

언니가 얘 뭐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저기 달 잖아, 자꾸 나만 따라다녀. 마당에도, 골목에도, 변소간에도. 이제 나 어떡해 언니?"

거의 울기 1초 전이었다.


언니는 전혀 일말의 동요도 없이 하늘을 봤다. 그러더니 잠시 골목을 나갔다가 다시 마당으로 와서 하늘을 봤다.

언니가 세상 시크한 말투로 말했다.


"나도 따라온다, 너만 따라오는 거 아니다."


나는 언니를 무한 신뢰하고 있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 엄청난 사실을 두고 팩트체크를 위해 부모님이나 학자들에게 물어보는 따위는 불필요했다. 언니 말을 단박에 수긍해 버렸다.


"아~~~~~그러쿠나~~~."


나는 지구를 구해야만 했던 30분 동안의 긴박한 상황을 뒤로한 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짱돌을 쌓았다.

막힌 가슴이 뻥 뚫린 듯 아주 시원했다.




달이 따라다니는 것 같은 이유는 달과의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우리가 움직이면 주변 물체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는데, 가까운 물체는 우리가 이동한만큼 멀어지는 반면, 멀리 있는 물체는 그 물체와 우리가 이동하기 전후의 지점들과의 각이 작아서 천천히 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달은 지상의 물체보다 훨씬 더 멀리 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에 가든 거의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혹시라도 주변에 어린아이가 혼자 깊은 고민에 빠져 있거나 무언가 말하기를 주저하고 있다면 먼저 한번 물어 봐 주면 좋겠다.


"너 혹시, 달이 자꾸 따라오니?"


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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