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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운로 그 아이 May 20. 2024

빨간 지갑 사건

이것이 산 교육

 "엄마아아아아"


그것은 마치 사냥에 성공한 세렝게티의 아기 사자와도 같은 효였다. 나는 빨간 지갑을 들고 우리집을 향해 질주했다.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는 생필품, 문구 등을 파는 잡화점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유리 진열장의 아랫부분이 돌에 맞았는지 깨져 어른 주먹이 들어갈 수 있을만한 구멍이 생겼다. 주인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몇 날 며칠 동안 유리를 방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 진열장 안에서 빨간 지폐 지갑 하나가 유리벽에 붙어 조금씩 구멍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나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다른 물건을 꺼내면서 생긴 빈 공간을 따라 계속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매일매일 앞을 지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그 변화를 관찰했다. 빨간 지갑은 마치 탈출이라도 하고 싶은 듯 계속 구멍 쪽으로 내려오더니 급기야 거의 구멍 근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며칠 지나, 드디어 디데이가 왔는지 빨간 지갑은 구멍 밖으로 몸체의 3분의 2를 내밀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잡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쑤욱 빠져나오는 것이 아닌가.

"이얏호!!!"

나는 정말 진심으로 기뻤다. 우연은 열심히 노력한 자에게 오는 선물과도 같은 것. 그동안 내가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이 매번 관심을 가지고 관찰한 덕분에 나에게 이런 행운이 온 것이다. 나는 지갑을 들고 집으로 달려갔다. 한시바삐 기쁜 소식을 엄마께 전해드리고 싶었다. 얼마나 좋아하실까, 나는 얼마나 칭찬을 받을 것인가.


"엄마아아아"

빛의 속도로 달려갔기에 집에 들어갔을 때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마당에 계시던 엄마가 웃으며 말하셨다.

"우리 정아 왜 그렇게 신이 났을까?"

나는 숨이 차서 대답 대신 빨간 지갑을 펄럭펄럭 흔들며 제발 빨리 좋아해 달라고 신호를 보냈다. 엄마가 기쁜 나머지 나를 대기권 끝까지 어화둥둥 들어올려 주실지 모른다. 장차 라이언킹이 될 심바를 들어올리듯이.


그런데 예상보다 엄마의 리액션이 좀 느렸다.

'아하, 내가 설명을 안 했구나, 엄마는 원래 흐지부지한 건 안 좋아하시지.'

나는 여차저차 이러쿵저러쿵  엄마께  초지종을 말씀드리고, 내가 생각해도 브리핑을 참 잘했구나 흡족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주머니한테 돈은 드렸어?"

예예? 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아뇨?"

엄마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럼, 아주머니가 너한테 가져가라고 하셨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그냥 가져왔습니다, 헤헤헤."

나는 실실 웃다가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저 멀리서부터 심상치 않은 전조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조금씩 흔들리고 새들이 훠이 날아갔다. 엄마 눈이 네 배로 지면서 주위 에너지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엄마는 전에서부 숨을 차곡차곡 밀어 올리시더니  침내  힘을 다해 뿜어 내셨다.


"왜 허락도 없이 남의 물건을 함부로 들고 왔써!!!"


삼이웃 뒤흔드는 진동이었다.  몸이 뒤로 청했.

어머니, 이러시면 저 날아갑니다아...

나는 혼비백산했다. 밖의 상황에 어쩔 줄 몰랐다.

 

"그게 도둑이라는 걸 몰라?"


칭찬은커녕 도둑이라 하시니, 기함할 노릇이었다.

엄마는 갑자기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으셨다. 회초리구나, 나를 때리시려는구나. 여태 살면서 엄마께 회초리로 맞아 본 적 없었다.


정리하자면 나는 회초리로 맞을만한 큰 잘못을 저질렀다. 그렇다면 그 잘못은 내가 주인에게 돈을 내거나 허락을 받지 않고 지갑을 가져온 것이었다. 아무리 지갑이 밖에 나와 있어도 그것은 먼저 잡은 사람이 임자가 아니라 여전히 주인의 이란 뜻이었다.

나는 누가 부연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이 상황이 빠르게 이해가 되었다. 엄마께 잘못을 빌어야 했다.


그런데 엄마는 회초리가 아닌 가위를 들고 나셨다. 내 눈앞에서 보란 듯이 빨간 지갑을 숭덩숭덩 잘라버리셨다. 마치 나의 잘못된 행동에 대고 가위질하는 것 같이.

그 광경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의 혁혁한 공적은, 실은 벌을 받아야 할 나쁜 행동이었다.


엄마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으시고 으로 나가셨다. 가게로 가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사과하고, 아직 어려 교육이 제대로 안된 점에 양해를 구하고 물건값을 지불하고 오셨다. 그래도 늘 가는 단골 가게이고 아주머니와 친분이 깊어서 이 일은 오해 없이 잘 마무리되었다.


나는 황한 훈계 없도 엄마의 대쪽 같은 행동을 보고 내 잘못을 바로 깨닫고 뉘우쳤다.




우리의 형편은 팍팍했지만 엄마한테는 원칙이 있었다.

많지 않은 월급이라도 무조건 절반은 저축한다. 남에게 절대로 빚지지 않는다. 아이들이 어디에 가도 손가락질 받지 않도록 올바르게 키운다.

그만큼 엄마는 자신감과 자존감을 가지고 사셨다.

그런 엄마에게 밖에서 남의 물건을 가져온 내 행동이 얼마나 큰 위기감을 주었을지, 평소와 다른 그날의 단호했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애들 가정교육 만큼은 철저하다 믿어 왔던 엄마는 무지렁이의 돌발 행동으로 위기를 맞았다. 기울어진 공든 탑을 갈아엎고 다시 초석을 놓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되어도 삶의 내실이 엄마의 반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 돌아가신 엄마에게 항상 지혜를 구한다. 엄마의 행적과 말씀이 나에게 답이 되어 돌아온다. 엄마는 돌아가셔도 돌아가신 게 아니다. 내 평생에 가장 뿌리 깊은 버팀목이 되어 계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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