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반]프로젝트24
by 한작
결국 ‘존엄사 선택법’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법이 통과되었다. 자신의 의지로 생을 마치고 싶을 때 최소한의 고통으로 자살을 선택할 수 있는 법. 몇 년을 치열하게 싸웠던 토론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만큼의 논란을 고스란히 남긴 채 법이 통과되었다.
30대 중반인 나에게, 이 법의 무게는 ‘갈 때 되면 가는 거지.’ 정도였다. 찬성 쪽 의견도 반대 쪽의 의견도 다 그럴듯했기에 철저히 방관했다.
찬성 의견의 핵심은 개인과 가족이 존엄을 지킬 마지막 기회라는 거였다.
대학교수였던 아버지가 심한 치매로 간호사 앞에서 자위를 하며 쾌감에 허리를 들썩이는 모습을 본 아들,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한 어머니 입에서 입에 담기도 힘든 쌍욕을 듣게 된 딸. 이어지는 연명 치료로 엉덩이 살이 썩어들어 가면서도 숨만 쉬고 누운 노인, 존엄사를 요구하는 이들의 주장은 납득할 수 있었다.
반대 의견도 무시할 수 없었다. 부양 의무를 저버리는 패륜 자녀들의 도피처가 될 가능성, 빈곤 노인의 장기 거래 시장이 될 가능성, 건강보험의 재원을 생명을 거두는 데 사용한다는 윤리 문제 등이 팽팽하게 맞섰다.
찢어질 것처럼 팽팽한 대립이었지만, 어쩌면 찬성 측이 이기는 건 당연했다. 당면한 문제 해결하기 위해 찬성하는 집단과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문제를 걱정해 반대하는 집단의 대립이 이만큼 팽팽했다는 것 자체가 쾌거였다.
논란이 되었던 만큼 존엄사를 선택하기 위해선 여러 조건이 붙어 있기는 했다. 신체에 재생 불가의 이상이 있는 경우, 85세 이상에 한해, 인지 문제가 없는 상태에서 결정 했을 때라는 조건이 붙어, 건강보험 비급여로 통과 되었다.
처음 몇 년은 아무 일도 없었다. 늘 그래왔듯이 어디에선 모진 생을 끝내지 못해 고통을 받았고, 어디에선 가족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며 생을 마치고 있었고, 누군가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쓸쓸한 죽음을 찾았다. 논란이 된 일이라곤 발빠른 사업가들이 상조 대신 존엄사 보험을 만들어 손가락질 받았다는 정도였다.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 죽기 위해 일을 하는 것. 이 차이는 모두에게 같은 의미로 전달되지 않았고, 40대가 된 나에게도 큰 의미를 가지지 않았다. 이건 단지 결론이 나지 않는 철학적 질문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고, 존엄사는 여러 노후대비 가운데 고려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내가 50대가 되었을 때도 세상은 아무 일 없이 흘러갔다. 누군가는 존엄사를 염두에 두고 남은 기간을 불꽃처럼 살았고, 누구는 하루하루 존엄사를 기다리며 지냈으며, 누군가는 가진 재물을 손에 움켜쥐고 영원히 살기를 바랐다. 변화가 생겼다고 느낀 건 60대가 되어서였다.
20년의 시간을 거치며 이미 익숙해진 존엄사는 인구 피라미드를 꽤 그럴 듯하게 다듬었다. 피라미드 모양에 가까운 인구 분포는 앞으로 번영할 인류를 상징하는 듯 했다. 노후 빈곤과 노년 일자리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고, 고독사와 건강보험의 건전성은 음모론이 되었다. 연금 고갈의 공포는 보릿고개와 똑같이 옛날이야기 속에만 존재하는 공포가 되었다.
재정 건전성이 확보되자 국가는 모든 노년 인구에 대한 복지를 확대했다. 65세 이상 성인은 간접세를 제외한 모든 직접세에서 해방되었고 모든 건강검진과 공공서비스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노년을 위한 공공서비스는 의료, 주거, 식사, 의복까지 완벽한 지원이 약속되었고 이는 곧 정년 퇴직이 완전한 노동 해방을 의미하게 됐다. 연금 지급 시기까지만 버틸 포트폴리오가 완성되면 모두가 행복한 노년을 기대했고, 더 이상의 노동은 거추장스러운 굴레로 여기기 시작했다.
완벽한 사회 보장 서비스가 제공된 이후 뭔가 잘못 되었다고 느낀 건 내가 70대가 되어서였다. 한없이 행복한 날들은 채 5년이 넘지 않았다. 얼마간의 노년 기간은 존경과 존중을 느낄 수 있었다. 회사에선 존경받는 상사로, 가정에선 열심히 가족을 위해 일한 가장으로. 그렇게 열심히 살았다는 내 생각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가족의 축하와 감사는 오래가지 않았다. 케이크에 꼽힌 촛불이 꺼지듯 감사와 축하는 사라졌고 난 가족 안에서 귀엽지 않은 아기에 불과했다. 방긋 웃는 것만으로 사랑받는 아기와 달리 내 웃음은 젖은 우비같은 불쾌한 호의였다.
그런 시선이 가족뿐만 아니라는 걸 느낀 건 여든이 되기도 전이었다. 누구라도 내 나이를 알아버릴 수 있게 된 시점에서야 난 지금 인류의 인구 구조가 만들어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를 보는 시선은 늘 비슷했다.
‘어째서 아직까지 살아 있는 거야?’
‘저 사람은 아직도 결정하지 않은 거야?’
‘왜 저렇게 살려고 하지? 이미 충분히 살았잖아?’
어딜가나 느낄 수 있는 시선이었다. 편하게 죽을 수 있는데 어째서 아직 살아 있냐는 시선들. 그런 시선의 압박은 무서우리만치 일상을 죄어왔다. 산책을 할 수도 없었고 병원에 갈 수도 없었다. 모든 걸 누릴 자격이 되었지만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스스로 느끼는 나이와 사회의 시선으로 보는 나이의 격차는 이미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켜만 준다면 아직 일을 할 수 있을 나이라고 생각했지만 사회가 보는 나는 이미 방전된 건전지와 같았다.
문득 앞서 죽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평균 사망 나이가 어째서 존엄사 허용 나이와 같은지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