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유치원 교사 생활을 했던 아내는 동화를 정말 많이 알고 있습니다. 보리가 이제 막 아내 뱃속에서 누울 자리를 잡았을 무렵, 책도 없이 노래하듯 동화를 읽어주는 아내의 모습은 참 예뻤어요. 동요는 또 얼마나 잘 부르는지, 주크박스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아내 덕분에, 저 역시 보리가 태어나기 전 '책 읽어주기' 기초 과정을 전수받을 수 있었습니다.
보리가 꽤 자란 지금, 책을 읽어달라는 부탁을 부쩍 자주 합니다. 엄마한테도, 아빠한테도요. 그렇다 보니, 요즘 들어 '읽어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느껴집니다. 그리고 '같은 책을 읽어주는 것'이 주는 지루함 역시도요. 그렇다고 같은 내용을 똑같이 읽어줄 순 없어요. 따분함에 익숙해지는 건, 어른이 되어서 받아들여도 충분하니까요. 그래서 스토리텔링은 부족하지만 최대한 노력해 봅니다.
그렇지만 역시나 한계는 있었습니다. 백설공주 이야기를 15번째 읽다 보면, 마녀가 거울의 팩폭을 받아들여 마음씨를 곱게 쓰길 바라게 되거든요. 아니면 왕자는 그냥 전통대로 정략결혼이나 하던지, 사냥꾼이 공주를 죽이는 데 성공하던지 해서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으면 싶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간신히 아이디어를 짜내 또 1독을 마치고, 보리를 살짝 쳐다봤습니다. 초롱초롱한 눈을 보니 아무래도 한 번 더 읽어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진짜 무지성 백설공주를 한번 탄생시켜 아무 말 대잔치를 해봤습니다. 과연 보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옛날, 어느 왕국에 예쁘고 착한 왕비가 살았어요. 이 왕비는 자기처럼 금빛 머릿결을 자랑하는 예쁜 딸을 낳았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공주의 미모를 보고 감탄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금발임에도, 겨울에 태어나지 않았음에도 '백설공주'란 이름을 붙여주었답니다.
공주는 쑥쑥 자랐지만, 몸이 약했던 왕비는 안타깝게도 하늘나라로 떠났어요. 혼자가 적적했던 왕은, 그새를 못 참고 새 왕비를 들였답니다. 그런데 새로 맞이한 왕비는 좀 이상한 사람이었어요. 용이 그려진 이상한 거울을 끼고 매일 같이 중얼중얼, 알 수 없는 대화를 하는 것이었어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네. 당연히 백설공주님입니다. 별로 어렵지 않은 질문이네요."
왕비는 화가 나서, 사냥꾼을 불러 백설공주를 눈앞에서 치우라 시켰어요. 충직하지만 눈치는 없는 사냥꾼은, 백설공주를 성 밖으로 데리고 가, 공주가 도시락을 먹는 사이에 날름 혼자서 성으로 돌아왔답니다. 왕비의 말대로 '눈앞에서 치운' 것이었어요. 왕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래도 개운했어요. 백설공주를 왕국 밖으로 내보내긴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면 적어도 이 왕국 안에선 자기가 가장 예뻤을 테니까요.
길을 잃고 헤매던 백설공주는, 일곱 난쟁이가 사는 오두막을 발견했어요. 피곤한 나머지 대충 침대를 골라 잠이 들고 말았지요. 얼마 뒤 사금 광산에서 오늘도 다이아를 캐려다 실패한 일곱 난쟁이가 돌아왔지요. 난쟁이들은, 사이즈도 안 맞는 침대에 누워 코를 골고 있는 공주를 보았지요. 곧 공주를 깨워 자초지종을 듣고는,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함께 살았답니다. 공주는 살림엔 자신 있었어요. 정략결혼을 대비해 일찌감치 신부수업을 들었거든요.
그렇게 백설공주는 자연스럽게 일곱 난쟁이의 식모가 되었고, 왕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답니다. 귀찮은 궁중 생활에 질렸었거든요. 물론 왕비 역시 백설공주를 더 이상 떠올리지 않게 되었어요. 어쨌든 왕국 밖에 있을 거로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왕비는 좋은 대답을 기대하며 거울에게 물어보았어요. 교묘하게 질문을 틀어서 말이에요.
"거울아, 거울아, 이 왕국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아, 또 물어보시네... 백설공주죠. 그게 왜 궁금하세요?"
사실, 일곱 난쟁이의 오두막은 길만 건너면 다른 나라인 접경지대에 있었어요. 즉, 백설공주는 아직 왕국 안에 살고 있었던 거예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왕비는 사냥꾼에게 따지기 위해 불렀지만, 이미 사냥꾼은 성과상여금과 퇴직 수당을 두둑이 챙겨 먼 나라로 떠난 뒤였어요. 왕비는 남의 손 빌어도 소용없다는 진리만 깨닫고는, 직접 해결하겠다 마음먹었어요.
그래서 얼굴을 마녀처럼 분장하고, 새빨간 충주산 사과를 준비해 공주를 찾아갔지요. 온갖 감언이설로 공주에게 사과를 선물했고, 맛있어 보이는 사과를 한 입 깨문 백설공주는 그만!! 쓰러지고 말았어요!! 먹은 사과가 평소 백설공주가 즐겨 먹던 유기농이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쓰러진 공주는 지나가던 운 나쁜 왕자의 입냄새에 깨어나 왕자의 나라로 떠났답니다. 왕비는 공주를 진짜로 치우는 덴 성공했지만, 분장이 지워지지 않아 그대로 마녀가 되고 말았답니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거울 앞에 터덜터덜 걸어와 이렇게 물어보았대요.
"거울아, 거울아, 이 방에서 누가 가장 예쁘니?"
"네, 마녀님. 바로 왕입니다."
왕비는 더 이상 사람의 외모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냥 눈 딱 감고 거짓말을 하면 됐을 텐데, 거울도 참 고집불통이지 뭐예요? 왕비는 허탈했어요. 아무것도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끼며 살기로 다짐했답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어요. 도망간 줄 알았던 사냥꾼이, 우연히 친해진 노무사를 끼고 왕국을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고소했거든요. 이 여파로 근로기준법 위반은 물론 건축물 불법 증축이나 사기 혐의 같은 것들이 깡그리 걸렸고, 결국에는 왕국 자체가 파산하고 말았답니다. 동화 끝~~~
이렇게 아무 말 대잔치로 이야기를 들려주며, 보리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이런 정신 나간 전개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중간중간에 유기농이 뭔지, 사냥꾼이 뭔지, 처음 듣는 낱말들을 물어보며 너무나 재미있게 듣더라고요.
게다가, 이젠 책은 아빠랑만 읽겠답니다.
이번 일로 또 하나 새삼 깨달았습니다. 이런 웃기는 제 취향이 오롯이 보리에게 전해졌다는 걸요. 그래서 이제부턴 책을 읽어줄 때도 조금은 더 부담 없이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보리 덕분에, 저 역시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빠와 보리의, 우리만의 이야기가 만들어져 갑니다.
고마워, 우리 딸. 그런데 아빠 이제, 다른 책도 읽어주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