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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이 May 12. 2024

나고야, 지독하고도 반가운 첫 만남

아찔한, 맛있는, 핑크빛의 기억.

§ 전철에서 만난 타국의 노숙인


 In & Out 공항을 다르게 한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 나고야 주부 국제공항에 내렸을 때 나는 기분이 홀가분했다. 며칠 뒤 다시 올 일이 없어 길을 기억해 둘 부담감이 없으니 그저 시내로 가기 위한 'Train' 표지판만 따라서 씩씩하게 걸어 나오면 될 뿐이었다.

나고야는 처음이었지만 일본은 일곱 번째 방문이라 그런지 어렵지 않게 기차표를 사고, 플랫폼을 찾아 열차에 탑승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혼잡한 역 안을 오고 가는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했던 내 모습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쨌든 화창한 날씨 덕에 기분도 설레며 여행을 시작했다.

나고야를 거의 못 미쳐 환승역인 가나야마까지는 열차로 약 40분. 창밖으로 보이는 일본식 주택가며 초록색 밭이며 모든 것을 신기해하며 반쯤 지나칠 무렵, 완연한 봄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털모자를 쓰고 털장갑을 낀 노숙인 한 명이 탔다.


시커먼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과 삐죽삐죽 길어져 나온 잿빛 머리카락, 매연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빛바랜 투명우비, 비닐에 싸서 둘둘만 짐을 실은 정체불명의 구루마까지, 정처 없이 떠도는 이가 분명했다. 잠시 승객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가 이내 거두어졌다. (이하부터는 노숙인이라는 표현 대신 '우비사나이'라고 하겠다.)


문제는 이 '우비사나이'가 앉을 자리를 찾으면서부터였다. 물론 '그'도 승객으로서 앉을 권리가 있었다. 내 옆자리에 부모 한쌍이 유모차 안 아이를 가운데 놓고 2.5석으로 앉아 있었다. 남은 0.5석이 '그'의 눈에 띈 것이다. '허엇..'하는 순간 아이 부모가 밀려나면서 내 좌측 자리가 채워지고 있었다.


"あ#!つ^@よ*~?" 그는 나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뭐라고 하는거지...' 눈이라도 마주쳤다간 괜히 시비를 걸어올 것만 같아 잠자코 있었다. 일부러 반대편을 쳐다보며 숨을 들이키는 순간, 난 내 코를 의심했다. '무슨 냄새지?' '밖에서 하수구 냄새가 들어오나?' 다시 한번 흐-읍.


'.......!!!'


밖에서 들어오는 냄새가 아니다. 바로 옆이다. 당황스럽지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다. '다른 자리가 있나?

열차 칸은 이미 만석, 가나야마까지는 두 정거장이 남았다. '그렇다면 옆 칸으로 옮겨가야 하나?'

나만 괴로운 건지, 다른 승객들은 생각보다 평온해 보였다.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 좀만 참자.'


다른 곳을 보고 다른 생각을 하며 아무리 주의를 환기시켜 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끼고 있던 마스크는 무용지물이 된지 오래. 그때 오른쪽에 가만히 앉아있던 아저씨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마스크를 꺼내 썼다. 심드렁한 듯한 표정이 일드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를 꼭 닮아 있었다. 그도 나와 비슷한 냄새를 느꼈던 게 틀림없다.

그러나 저러나건 간에, 남은 두 정거장을 무사히 참고 갈 수 있을까. 점점 코로 쉬는 숨이 짧고 가빠졌다. '이노가시라 아저씨는 괜찮나?'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고개를 젖히고 멀뚱멀뚱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러면 좀 낫나?'싶어서 나도 덩달아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아.. 조금 덜하긴 하구나..' 그렇게 둘이서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끄덕거리고 있자니, 건너편 아주머니의 눈빛이 킥.. 하고 웃고 있었다. 두 명이 연달아 앉아서 소리 없이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을 것이다. 나도 그 상황이 우습긴 마찬가지였지만 웃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참으려고 참아보려고 부단히 노력하다 보니 한 정거장을 지나쳤다. 하지만 문이 닫히자마자 후회가 밀려왔다. '아, 방금 그냥 내렸다가 옆 칸가서 탈걸.' 10여 초 사이에 인내심이 바닥난 것이다.

아닌 건 아닌 것이었다. 그에게 자리에 앉아갈 권리가 있듯이 내겐 불쾌한 공기를 감내할 의무는 없는 것이었다. 조금만 더 빨리 이 사실을 받아들였더라면.


결국 가나야마 직전 정류장에서 문에서 튕겨지듯이 나와 뒤 칸으로 내달려서 탔다. 이노가시라 아저씨도 날 따라내렸는데 아마 앞 칸으로 간 것 같았다. 그렇게 낯선 동승자와 환장의 콤비가 되었다가 헤어졌다.


3일간 묵을 호텔에 도착해서도 코 끝에 찡하게 그 냄새가 맺혀있었다. '아... 안 없어져.' 웃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다른 공기를 마셔야 했다. 입맛이 없는데 배는 고팠고 기분전환이 필요했다.



§ 나의 첫 나고야 메시(なごやめし)


 나고야 지역만의 특색을 갖춘 식사를 '나고야 메시'라고 한다. 특히 일본 된장인 '미소'가 주재료인 것 같다. 미소 돈가스, 미소 우동, 미소 오뎅... 언젠가부터 나는 취향과 상관없이 현지의 식사를 조금 더 경험하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첫 끼를 아침에 먹었고 어느덧 오후 4시였으므로 뭘 먹긴 해야 했다. 허기가 질 때는 고기를 먹어줘야 기운이 나기 때문에 아무래도 '미소 돈가스'를 먹는 게 좋을 듯했다. '야바톤'. 어디서 많이 들어본 곳 같다. 한국에도 있었던가. 이 야바톤의 본점이 때마침 나고야에 있었다. 근처 구경도 할 겸 살살 걸어서 식당으로 향했다.

날이 좋아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걷고 있자니 뭔가 후련하면서도, 열차 안의 아찔한 경험을 비롯해 한나절 간 느낀 나고야 사람들의 무뚝뚝함이 생각나 낯선 동네가 더 낯설게 다가왔다. 도쿄, 오사카와 같은 관광도시에서는 늘 친절한 응대만 받았었기에 영어로 물어봐도 일본어로 대답해 주는 것이 조금 황당했고, 기분 탓인지 외국인인 걸 알면 살짝 멀리하는 것 같아 이방인의 서운함이 마음 한편에 그늘을 드리웠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난 정말 일본스러운 일본 동네에 그제야 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생각 저 생각, 원래 이런 성격이라 해도 참 생각이 많다. 눈으로는 도시를 구경하고 속으로는 나고야를 잘 온 건가 못 온 건가 걱정 반 기대 반, 내면의 나와 설왕설래하며 어느덧 식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마음의 걱정을 한 움쿰 덜어놓게 되었다.


입구에서부터 웃으면서 맞아주는 직원, 배려해 준 것인지는 몰라도 이미 몇 사람이 식사 중인 카운터의 1인석 대신 벽으로 막혀있는 2인석을 내주고 배낭도 옆에 내려놓으라 한다. 흔쾌히 영어 메뉴판을 가져다주고 주문에도 영어로 대답을 해주는 성의가 있었다.

주문한 데판 미소 히레가스는 평범한 맛이었지만 일본 된장소스의 묵직함이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그리고 다 먹고 문을 열고 나서는 내 뒷모습에 대고 주방 요리사들까지 다 들리게 고맙다고 인사를 해주었다. 예의상이라고 해도 안 하면 그만인 것이었으므로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두지 않았음에 내심 고마웠다.


그렇게.. 나고야를 선택한 나 자신에 대한 의심이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 오아시스 21과 작은 호텔방이 선물해 준 나고야의 야경


 여행지에서의 첫날은 '멀리 가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본다'라는 루틴이 생겼다. 호텔이 위치한 사카에역은 명동과도 같은 곳이어서 굳이 다른 역으로 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호텔로 들어가기로 했다.

여행 책자를 봤을 때 '무슨 버스터미널 건물을 구경해?' 했었지만 '오아시스 21'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 1층과 지상 2층까지는 상점, 식당가, 버스터미널이라서 너무도 뻔해 보였던 게 사실.

그렇게 반신반의하며 루프탑에 올라갔더니 물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은 나고야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잔잔한 BGM과 함께 이따금씩 솟구치는 분수, 핑크색으로 빛나는 미라이 타워를 바라보며 다사다난했던 나고야에서의 첫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한동안 물에 비치는 야경을 멍하니 감상했다. 물이 긴장했던 마음을 평온하게 잠재워주었다.

차분해진 기분으로 호텔방에 들어와서 잘 준비를 마쳤다. 침대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별생각 없이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휙 걷었다. 그리고 그날의 피날레, 작은 호텔방이 준비한 선물을 창 밖에서 발견했다.

침대에 누워서 훤히 내다보이는 핑크빛의 미라이 타워. 나고야의 랜드마크가 앞으로 3일 동안 내 방 창문을 비춰줄 것이었다. 뜻하지 않게 얻은 호사에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긴 여행의 첫날을 마무리하며 잠을 청했다. '아무래도 시작은 조금 고약했지만 나머지 날들은 더 좋은 일과 사건들이 생기지 않을까?'하고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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