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고야에서 겪었던 뜻밖의 이야기.
나고야에서의 둘째 날 오전, 어느 명소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10여 분 전에 봤던 모습으로는 관람객들에게 그가 지키고 있는 어떤 고적에 관해 일본어로 안내해 주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다시 그 앞을 지날 때에 그와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어차피 일본어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나이가 일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그에게 영어로 설명을 요구할 수도 없고.. 일본어를 잘 모른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해서 발길을 돌리려는데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그가 생긋 웃고 있었다.
'흠...' 망설여지긴 했지만 외면하기도 어려워 고적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다. 간혹 일본 사람들이 나를 자국민으로 착각하기도 해서, 기껏 열심히 안내해 준 게 소용없는 일이 될까봐 외국인임을 알게 하기 위해 일부러 "Hello." 하고 영어로 인사를 했다.
그제야 외국인임을 알아채고 잠시 멈칫-하더니 "where are you from?" 하고 물었다. 아주 짧은 일본어로 "칸코쿠-"라고 대답했다. "aha-"하며 희끗한 머리를 한번 긁적이더니 영어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는 짧고 명료한 말들로 그 고적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서.
나이가 무색하게 꽤 영어가 유창한, 그리고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그의 수고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고적을 그와 함께 둘러보며 한 마디의 설명도 놓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했다.
모든 안내가 마무리되고, 'thank you and 아리가또고자이마스'라고 작별인사를 하려던 참인데-
"ah- one more thing." 하고 나를 멈춰 세우는 것이었다. '더 설명해 주실 게 남아있나 보다'하고 다시 귀를 기울였는데, 그 뒤에 이어진 그의 말들이 너무나도 뜻밖의 것들이었다.
"히데요시-" 그의 첫마디 중 저 단어를 들었을 때 약간의 당혹감과 함께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표정을 다시 고쳐 짓자마자 '그리고 백 년 전에도 우리나라(일본)가 너의 나라(한국)를 힘들게 했던 것, 나쁜 일이 있었던 것을 do apologize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조금의 틈도 두지 않고 깊이 허리를 숙여 다시 한번 나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몇 초가 안 되는 짧은 시간 내에 급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어떤 상황인지 알면서도 실감이 되지 않았다.
잠깐 사이에 많은 생각과 감정들이 내 속에서 스쳐 지나갔다. 놀랍다. 당황스럽다. 고맙다. 대단하다... 그는 아무리 빨라야 광복 즈음, 아니면 그 이후에 태어났을 텐데. 그리고 그의 조국은 다른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도록 가르쳤을 것인데 이게 가능한 일인 것일까?
반대로 나의 조국이 과거의 침략국이었다면.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는 조국이 가르친 역사를 좀 더 믿고 싶지 않았을까? 반백년 가까이 나이가 어린 상대국의 청년에게 이런 사과의 말을 건넬 용기가 있었을까? 나조차도 이렇게 그 옛날의 과오를 인정할 수 있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며 현재가 더 중요하다'라는 식인 일본의 입장은 흔히 접해왔었고, 그런 태도로 보아 그들이 지난날에 대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거라는 기대는 접은 지가 오래였다. 그러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연령대의, 나이가 지긋한 한 노인에게서 허리 굽힌 사과를 받았던 것이다.
그 자신이 한 일은 아니어도 과거의 Japan은 잘못했다, 진심으로 apologize 한다고 한 번 더 고개를 숙였던 그 노인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영어와 몸짓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단어와 표현을 총동원하여 몇 번이고 사과를 거듭했던 그의 말들이 지금도 가슴에 먹먹하게 맴돈다.
대답 하고픈 말들은 많았지만 달리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we can be friends, thank you for your warm words and どうも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하고 머리 숙여 작별 인사를 했다. 살면서 두고두고 이때의 일이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용기에 대해 나 또한 한 인간으로서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내게 과거는 밉고 현재는 좋은 일본. 과거의 사람이 현재의 나에게 와서 미안하다고 악수를 청한 기분이다. 국가 간의 완전한 사과와 용서가 있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그저 좋은 사람은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사람된 情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