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펀, 허우통을 거쳐 지우펀을 다녀오기까지.
징통에서 출발해 기관사 아저씨와 짧은 만남과 작별을 하고 스펀역에서 내렸다. 여기에 오면 꼭 한 번씩은 한다고 하는 천등 날리기. 어디 나도 한번 소원을 적어 날려볼까.
길거리 어디에서나 천등을 걸어 놓고 붓으로 소원을 적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쓰인 말들을 흘긋 쳐다만 봐도 중국어, 영어, 일본어, 한글.. 정말 다양하다.
이왕 비는 소원인 김에 최대한 범위를 넓게 잡아서 열심히 썼다. 가족과 친구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의 행복과 금전적 부자만이 아닌 마음의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하늘로 멀리멀리 점이 되어 날아가는 나의 천등. 내 소원이 하늘 끝에 닿아 이루어지길 바라며 시야에서 사라져 갈 때까지 배웅해 주었다.
천등을 날려보낸 뒤 '미니 나이아가라 폭포'라고 하는 '스펀폭포'를 보러 간다.
'앞으로는 익숙한 것들에는 덜 의지하며 새로운 곳에 많이 다니고 이것저것 많이 보기로 했으니.'
언제 또 올지 모를 곳이라 근처의 볼 만한 것들은 몽땅 눈에 담아 가기로 했다.
긴 출렁다리를 건너간다. 여러 사람이 오가다 보니 발을 딛는 나무판자가 상하좌우로 조금 흔들려 어지럽지만 이쯤이야.
중간중간 들어선 노점상과 조형물들을 지나쳐 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목적지.
큰 규모는 아니지만 파란 하늘과 짙푸른 녹음 한 가운데에서 여러갈래로 쏟아지며 청량한 소리를 내는 스펀폭포.
무지개까지 덤으로 볼 수 있어 행운이었다.
시원한 물소리를 듣고, 물보라와 무지개를 감상하며 잠시 동안 명상의 시간을 가졌다.
다시 스펀역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나타난 딱 적당히 토실한 귀여운 치즈냥 한 마리.
"냥냥아, 스펀역으로 돌아가는 길까지 나랑 같이 걸어주지 않을래?"
예상했던 대로 보기 좋게 거절당하고 (사실 들은 체도 안 했다.) 스펀폭포 치즈 길냥이는 내 앞을 가로질러 건너편 바위 위쪽으로 폴짝폴짝 뛰어올라 홀연히 사라졌다. 안녕! 건강해!
다시 돌아온 스펀역에서는 아직도 천등 날리기가 한창이다. 아니, 사람이 더 몰려들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소원이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올라간다. 다른 말로 제각각 적힌 이 소원들의 공통분모는 하나일 것이다.
나의 행복, 내 사랑하는 사람의 그리고 그 사람과의 행복.
모두가 바라는 대로 행복하게 해주세요.
스펀역에서 출발하는 기차 시간을 십여 분 남기고 안 먹어보고는 후회할 것 같아서 커다란 닭날개 볶음밥을 급히 사서 입에 쑤셔 넣었다.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꽤 큰 사이즈인데 날개 껍질 속에 볶음밥이 한가득 들어있고 겉에 발린 후리카케와 양념은 단짠단짠이라 입맛을 당기게 한다.
스펀역에 와서 천등도 날리고, 폭포도 보고, 닭날개볶음밥도 먹고. 야무지게 할 거 다 했다. 대만족.
이제 기차를 타고 허우통 고양이 마을로.
기차에서 내려 언덕을 올라가면 나오는 마을 입구의 벽화와 저 위 꼭대기의 고양이 상까지, 정말 고양이 마을답다.
언덕 위 담벼락에 걸터앉아서 마음껏 세상을 구경하는 고양이.
내 맘을 읽은 듯 계단에 서서 마치 사진 포즈를 취해주는 고양이.
소품샵 입구를 막고선 천하태평으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고양이.
아무데서나 몸을 붙이고 있는 고양이들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만 보았다.
정이 들을까봐 만지지는 않았다. 이게 그들의 귀찮음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곳곳마다 놓여 있는 사료 그릇, 그들 목에 채워져 있는 알록달록한 매듭.
허우통 마을사람들이 고양이들에게 주고 있는 정감과 온정을 느낄 수 있었다.
배고프다고 사람을 쫓지 않고, 손길을 주는 이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이토록 온화한 성격의 고양이가 된 것은 옆에서 함께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보살핌 덕이리라.
허우통 마을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오래오래 지금처럼 더불어 살아가길.
아침에 왔던 루이팡역에 늦은 오후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하루가 이렇게 가다니.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대만 여행 영상이나 블로그를 보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 있다.
사진과 영상으로만 보던 곳,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한 장면을 담은 것 같다는 지우펀.
버스를 타고 일부러 사람들이 많이 안 내리는 정거장까지 두어 개 더 올라가서 내렸다.
지우펀 상점가 입구에 발을 들이자 평일 초저녁인데도 사람이 좀 많다고 느껴졌다. (평소에 사람이 많은 곳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라)
이때라도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고난의 길이 눈앞에 펼쳐지리라는 것을....!
상점가를 따라 걷다가 어느 시점 즈음 꼭대기에 다다랐을 무렵, 움직이는 사람들을 따라서 살살 내려가 본다.
그런데,
'3분 뒤에도 제 자리에 서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일까?'
다시 3분 뒤... '이건 아닌 것 같다.' (이미 늦었음)
그렇게 야금야금 20분을 잰걸음으로 내려와봤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이게 뭘까 싶으면서도 이젠 늦었다 싶어서 노을 지는 풍경을 기다리는 건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길은 가파르고 좁은데 사람들은 많아지다 보니 조금 무섭기도 했고, 이 인파 틈에서 석양을 기다리는 것보단 시먼역(숙소)으로 돌아가서 맛있는 저녁을 먹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다 '아매다루'라는 찻집 앞에 와서야 왜 그토록 내려가는 길이 더뎠는지 깨달았다. 골목 위에 늘어진 홍등 사이로, 저 멀리 아득한 바다가 보인다.
의식의 힘으로 가까이 보이는 새빨간 등과 간판을 시야에서 살짝 걷어내고 나면, 대만을 둘러싼 바다와 먼 섬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이제 지우펀에서는 내려가도 되겠네 싶었다. 이로써 인파에 치인 피로감을 충분히 보상받은 기분.
번화한 구역을 벗어나니 하늘이 조금씩 주황빛으로 물들어간다.
'이렇게 시원한 우롱차 한 잔 마시면서 쉬엄쉬엄 구경하며 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네.'
'드디어 벗어났다!'
하지만..... 30분 뒤...............
나는 지우펀 언덕 위로 다시 버스정류장을 거슬러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버스들이 내가 서 있는 언덕 아래 정류장에서는 정차를 하지 않았다. (언덕 위에서 만차가 되기 때문)
그래서 나는 처음에 버스를 타고 지나쳐갔던 그 정류장들을 다시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버스로 올라갈 때 편했으면, 내려올 때도 위에서 타는게 편한 법인데.
난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중 '올라갈 때 편한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헛웃음이 나온다.
그렇게 내려와서 버스를 기다린 30분, 다시 거슬러 걸어 올라온 30분, 올라와서 버스를 기다린 30분.
3배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 끝에 숙소에 돌아올 수 있었다.
시먼역(숙소)에 내렸을 때, 식당을 찾아서 앉을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지친 다리를 끌고 겨우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를 사고, 전날부터 눈독 들였던 줄 서는 튀김집에 오징어, 베이비콘, 줄콩을 테이크 아웃해왔다.
대부분 기다리던 사람들이 이 동네 사람들 같던데 이렇게 현지인 라이프 흉내 내보는 거지 뭐.
한 잔 마시고 침대에 몸을 던지고는 생각한다.
'지우펀을 지옥펀이라고 부르는 건 사람이 많아서일 텐데, 난 왔던 길을 다시 걸어 올라가기까지 해서 1+1 지옥펀을 경험한 셈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