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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이 Apr 04. 2024

열흘 남기고 지른 홀로 대만② - 핑시선 기차를 타고

타이베이에서 루이팡으로, 루이팡에서 맨 끝역 징통으로.

시먼역에서 맞는 둘째 날.

전날 밤까지 내리던 비가 멎고,

거짓말처럼 날이 갠 대만의 두 번째 아침!

날씨마저 신기하구나.


그럼 기차여행을 떠나볼까나.


한자와 영어로 표기되는 기차 플랫폼 전광판, 눈 깜짝할 새에 놓칠세라 예의주시한다.


타이베이역에서 루이팡역까지 기차(TRA)로 가고 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핑시선 기차여행이 시작된다.

핑시선은 1921년에 탄광촌끼리 연결하여 만든 석탄 수송 철도다. 1980년대 들어 광업은 쇠퇴하고, 열차는 관광객을 실어 나르는 용도가 되었다. 역마다 각자의 특색으로 마을과 상점이 조성되어 보는 재미가 있는데. (↓)


핑시선 정차역 : 루이팡 - 허우통 - 산댜오링 - 다화 - 스펀 - 왕구 - 링자오 - 핑시 - 징통(종점)


징통 : 대만에 4개 남은 목조 역사 중 하나. 넓은 풀숲을 헤치는 철길과 역 근처 경치를 구경하기 좋은 곳.

핑시 :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의 영화 촬영지, 스펀 이전에 천등을 유행시켰던 소박한 마을.

스펀 : 낡은 주택과 철길 사이로 기차가 지나는 곳. 사잇길에서 천등을 날린 후 스펀폭포를 구경하러 가자.

허우통 : 역 양쪽의 언덕으로 형성된 고양이 마을. 길에서 심심치 않게 쉬고 있는 고양이를 만날 수 있다.

루이팡 : 핑시선 기차여행의 시작점이자 되돌아온 후 지우펀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중요 지점.


루이팡역사와 근처 거리 탐색 中


일찍 루이팡에 도착해서 종점인 징통까지 쭉 간 다음 여유로이 거슬러올 생각이었는데, 방금 열차가 떠났다는 역무원의 말씀. 다음 열차는 50분 뒤...


예전 같으면 이런 상황은 파워 J인 나에게 ‘왜 루이팡에서 출발하는 기차 시간까지 알아놓지 않았냐(이 바보야)’라고 스스로를 탓했겠지만, 뭐 지금은 문제없다. 그럼 남은 50분 동안 '계획에 없던' 루이팡역 근처를 둘러보기로 한다.


루이팡역 근처에 사는 고양이들. 눈을 꿈뻑꿈뻑하며 쳐다만 볼 뿐, 사람을 봐도 도망가지 않는다.


대만의 어딜가나 그곳 길냥이들은 한국 녀석들과는 다르게 '사람'을 매우 친숙한 존재로 느끼는 듯했다.

사람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사진을 찍거나 말거나 본둥만둥. 후다닥 도망가거나 경계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 자리에 있고 싶으면 누가 옆에서 뭘하든 머물고, 왠지 저쪽이 궁금하면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발걸음을 떼곤 한다.


주저 없이 행동하는 이 고양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난 내 갈 길 갈테니 막지말라옹', '난 내가 너에게 관심을 주고 싶을 때 갈거라옹', '내 맘대로 할테냐옹'이라고 하는 것 같다. 이거슨 바로 내가 배워야 할 자세. 


'회사에 돌아가면 남의 눈치만 보지 말고 나도 길냥이처럼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아야지.'




루이팡 골목 산책을 하고 난 후, 열차를 타고 4~50분을 달려서 도착한 핑시선 종점인 징통역.

폐건물을 개조한 탄장가배라는 카페에서 보는 경치가 그렇게 좋다 하여 구글맵이 가르쳐 주는 방향을 보니..

'뭐어? 철길 건너는 거 맞아??' 의아스럽지만 조심조심 건너가본다. (소심한 척하며 선로 사진도 남기기)



철길을 건너 언덕 위로 약간의 계단을 올라가면 만날 수 있는 큰 건물.

과거 석탄 창고와 세척장으로 쓰였던 곳을 카페로 만든 탄장가배에 도착했다.



야외 테라스에 한 테이블 손님은 있는데, 카운터에 사람이 없다.

'Hello, Hello~' 2, 3분을 소리 내봐도 인기척이 없어 당황스러워지려고 할 때 머리가 희끗하신 남 사장님이 웃으며 반겨준다. 새우 덤플링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니 저 안쪽에 앉아 있으라고 하신다.


널찍한 탄장가배 카페 내부
자리잡은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징통역 전경


평일 한가로운 오전이라 운 좋게도 제일 안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두 개뿐인 창가 중에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맞은편의 산과 능선, 그 내리막에 자리 잡은 역과 집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이 풍경은 하늘이 내게 마음껏 누리라며 허락해 준 소소한 사치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한 10분? 15분? 지났을까, 새우 덤플링(직접 빚은 물만두)과 커피가 나왔다.


생각보다 크고 넉넉한 만두 양에 놀라고, 입에 넣어 씹어보니 진한 새우향과 통통한 새우살의 간간함에 또 놀라고, 큰 기대하지 않았던 커피 한 모금의 향과 맛에 다시 놀라고,

커피잔을 들어 경치와 함께 보니 지금 이 시간, 이곳에 와 있는 내가 놀라웠다. 


'이렇게 쉬면서 맘 편히 여행해 본 게 얼마만인지.. 아니 처음이지. 

예전엔 귀국하면 회사 가서 뭘 또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지 하는 잡념이 꼭 한 번씩은 끼어들었었는데, 

아무 걱정도, 할 일도 없이 풍경만 넋 놓고 구경할 수 있는 이 시간이 내게 주어졌음에 참 감사하다.'


든든하고 맛있었던 점심식사를 뒤로 하고, '지금 와보고 또 와보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하는 마음으로 건물 사진을 남겨본다. 카페가 아니었다면 으스스했을 폐건물이 광산의 옛 추억을 간직한 든든한 징통역의 지킴이처럼 보인다.



탄장가베에서 징통역 철로로 내려오는 계단에 피어있던 이름 모르는 꽃.


'초점이 맞지 않아도 괜찮아. 예쁘니까.'





그리고 종점인 징통역에서 다시 루이팡 방향으로 거슬러 가는 열차에 탔다.

원래 계획은 바로 다음 역인 핑시역에서 내려서 구경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난 핑시역을 지나쳤다.

사진엔 껍질뿐이지만 저 흑당매실사탕을 건네준 기관사님의 순수한 친절함에 답을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는 철길의 매 순간을 찍고 싶어 맨 앞 창가에 어물쩍하게 서성이는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처음엔 외국인이라고 단지 호기심에 말을 붙이는 거란 생각이 들어 참 어색하고 어떻게 대꾸를 해야 할지 난감했는데, 이내 그가 평범하고 선량한 대만 사람 중 한 명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는 번역앱을 통해 내가 선택한 열차 맨 앞 자리에 대한 팁을 전했다. 


'이곳이 사진을 찍기에 베스트 스폿입니다.'

'창가에 핸드폰을 바짝 붙여서 세워두면 사진이 잘 나올겁니다.' 


그는 그저 외국인 아가씨에게 그가 아는 사소하지만 최고의 촬영 팁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말대로 찍은 철길 사진과 영상은 지금도 내가 그 기차에 올라타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담겼다.

또 뭘 알려줄까... 하는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하는가 싶더니 한국어로 된 관광책자를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내어 건네주신다.



그래서 난 핑시역을 그냥 지나쳐버렸다.

뭐라도 하나 더 알려주고 싶었던 기관사 아저씨의 친근함에 감사했다.

나도 번역앱을 통해서 그에게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답장을 했고, 우린 함께 셀카도 찍었다. 오래오래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서. 



그도 '다음에 또 내가 모는 열차에 타줬으면 좋겠다'고 답하고서는 우린 서로 'Bye Bye~' 했다.

핑시역과 몇 개의 역을 통과한 후에, 나는 다음 역인 스펀역에서 내렸다.



아저씨, 다시 핑시선을 타게 되면 다음에 또 만나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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