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101, 디화제와 용산사. 타이베이의 마지막 밤.
고요한 아침.
전날에 다녀온 지우펀 탐험과 고행의 여파로 온몸이 찌부둥하다.
저절로 눈이 떠졌고, 다리는 아프지만 어슴푸레한 방 안에서 맞는 타국 대만에서의 아침이 다시 설레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이날은 국립고궁박물원에 가기 위해 9시쯤 서둘러 나왔다.
박물원에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야자수와 가로수가 공존하는 타이베이의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본다.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은 장제스가 중국에서 넘어올 때 만리장성 빼고는 다 들고 왔다고 할 정도로
중국 고대부터 한나라, 명나라, 청나라, 근대에 이르기까지 보관하는 유물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한다.
또 이런 말도 있다지, '자금성을 보려면 북경으로 가고, 자금성의 보물을 보려면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으로 오라'고.
입구 주위로 둘러진 나무가 박물원 건물과 돌길을 사이에 두고 대칭을 이루고 있어 참 조화롭다.
그리고 파란 하늘에 햇살을 받는 박물원과 바람에 나부끼는 국기의 전경은 더욱 웅장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동안 참 세상사에 관심 없이 살아왔던 나이지만, '이제는 삶을 좀 더 공부하면서 살아가자'라는 마음으로 난생 처음 오디오 가이드를 빌려본다. 그리고 이 연재 글의 제목처럼 다신 못 올 수도 있으니까, 매 순간 그 순간에 최선을 다해보는 것이다.
박물원의 3대 보물 중 하나라는 청나라 시대의 유물 육형석(肉形石)을 볼 수 있었다.
자연적인 옥을 다듬어 동파육을 묘사했다고 하는데, 고기 겉면과 속살의 질감의 표현이 마치 먹음직스런 음식을 보는 것 같다. 손으로 잡으면 말랑거릴 것 같은 생각마저 들었다.
또 하나의 인기보물인 취옥백채(翠玉白菜)는 자연옥을 다듬어 배추와 그 위에 메뚜기, 여치를 묘사했다고 하는데, 다른 박물관에 전시 중이라 안타깝게도 만나지 못했다. 아쉽지만... 다음이 있다면 꼭 만나자.
1층에 위치한 커다란 부처상 앞에서, 아른한 불경 소리를 들으며 잠시 감상해보는 여유도 가졌다.
직접 듣고 보는 게 남을 것 같아, 박물원에서 찍은 사진은 단 몇 장뿐이지만 약 4시간 동안 찐한 관람을 했다.
꼭 중국만의 역사에 치우쳐서 보지 않더라도,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진화과정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 필요에 의해 상상되는 모든 물건을 가질 수 있는 발전한 현세에 살고 있는 내 모습을 돌이켜 보니, 개인으로서는 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그리고 이 시대가 오기까지 얼마나 수도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다녀간 것일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박물원 일정을 마치고 MRT 맨 끝에 위치한 항구도시 단수이에 갈 계획이었으나, 전날의 지옥펀 체험으로 얻은 컨디션 난조로 인해 과감히 단수이 일정을 날리기로 결심한다.
'난 J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다!!!! 틀을 깨부수자!!!!'
어느덧 어둑어둑한 저녁이 되고, 이 나라의 랜드마크인 타이베이 101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TV에서 보던 건물의 외관을 실제로 와서 보니, 약간의 성취감도 느껴진다.
이왕 타이베이의 야경을 볼거라면 최상층에서 보고 싶었다.
드디어 101층, 지상 508m에 올라왔다.
Stay rooted but aim high.
뿌리를 내리고 목표는 높게, 근본은 땅에 두되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에 도전해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조용한 101층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 여유있게 야경을 감상해본다.
고요한 가운데 번잡한 도시의 야경을 홀로 내려다 보는 기분이 참 묘하다.
그림엽서같이 찍히는 타이베이의 야경.
사진으로도, 눈으로도 한 장면 한 장면을 꾹꾹 눌러 담았다.
지진으로 흔들릴 때 건물이 움직이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여서 균형을 유지해 준다는 660톤의 거대한 진동추.
내가 가있는 동안은 괜찮았으나, 최근 대만에 지진이 일어나 혼란스러워진 모습에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착잡하다. 하루 빨리 아픔을 딛고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길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내 기억 속에 남은 행복하고 평화로운 대만을 다시 보고 싶다.
타이베이 101에서 야경 감상을 마친 후, 바로 앞 큰 쇼핑몰 전면이 삼성 갤럭시 S24 울트라 광고로 장식되어 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잠시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져 본다.
이날의 저녁식사도 테이크 아웃으로... 나는야 타이베이의 당당한 혼밥족이렸다.
대만 국민음식이라는 루로우판(≒장조림덮밥)과 Taiwan beer를 즐기며, 세번째 밤을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대만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호텔 가까운 곳에 다들 쇼핑을 위해 들른다는 까르푸가 있다. 사람이 붐비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한가하게 아침에 둘러보기로 했다.
붐비는 건 안 좋아해도, 난 어느 나라든 어느 도시에 가든 '마트'나 '시장'구경하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다 살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과자나 조미료, 컵라면 구경하는게 신이 나는 것일까.
그 와중에 우리나라 마트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드는 광경.
우리나라 라면을 이렇게도 좋아한단 말인가. K-spicy의 열풍을 새삼 실감한다.
대만의 옛날 감성을 온전히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는 '디화제'.
한약 재료와 건강식품, 목재 생활용품과 같은 것들을 파는 상점들이 모인 전통 깃든 거리이다.
거기에 옛것의 멋을 한껏 느끼게 하는 100년 이상 된 즐비한 건물들.
흑백영화 속의 한 장면에 내가 서 있는 것만 같다.
이 정겨운 거리를 두고두고 꺼내볼 요량으로 정성껏 찍어보는 사진.
호젓하게 디화제를 거닐어본다.
옛 건물 옆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그저 걷기만 해도 좋은 디화제를 오랜 시간 산책하며 잔잔한 감성에 취해 보았다.
마지막 날이다 보니 하나만 더 보자, 한 군데만 더 가보자 하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정말 마지막으로 용산사(龍山寺)를 가보기로 한다.
입구에 다다르니, 환하게 밝혀진 노란 종이등의 불빛에 압도된다.
안으로 들어서면 색색깔의 조형물들이 알록달록하게 빛을 내며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본관 건물에는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드리려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많은 이들이 찾아와 소원을 빌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감사의 뜻을 담아 음식이나 과자를 올리며 향을 피우는 광경들을 보고 있자니
불교신자가 아닌 나에게도 더불어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것만 같다.
이렇게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호텔 근처 번화가를 한 바퀴 둘러보며, 맹인 소년의 애절한 플룻 연주도 감상할 수 있었던 선물과도 같은 밤.
돌아가서 친한 이들과 가족에게 선물할 과자들을 괜히 한 번 침대에 펼쳐놓아 보기도 하고.
왔던 설레임만큼 돌아가서의 설레임도 기대하며 잠을 청했다.
체크아웃 직전 이번엔 나에게 무슨 말을 해줄지 카드를 한 장 뽑아봤다.
This is a good time to make a NEW plan.
다시 어디로든 떠나보라는 것일까, 예전처럼 늘 하던 습관대로 갇혀 살지 말라는 것일까.
무슨 뜻이 되었든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내게 전하는 조언과도 같은 말.
아니면 내가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격려인지도 모른다.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 하지 말고, 새로운 일을 어려워하지 말고, 늘 하던 틀에 박히지말고,
NEW plan을 만들어 나가는 활기와 긍정을 가지고 앞으로를 살아나가자.'
스스로 나 자신의 편은 내가 되어 줄 거라 다짐하며, 5일째 이른 아침의 비행기를 타고 난 한국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못 올 것 같은 마음으로 여행했지만, 늘 내게 친절하고 낭만적이었던 대만.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4박 5일의 보석 같았던 시간을 추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