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간 일본 여행을 하며 느낀 짧은 소회들.
· 평일 : 출근 - 커피&오전업무 - 점심 - 커피&오후업무 - 야근 - 퇴근 - 야식&취침
· 주말 : 침대 - 사발면&소파&TV - 분리수거 - 배달음식&소파&TV - 침대
휴직 전 내 삶의 패턴이다. 주로 평일엔 '회사-집', 주말엔 '집집집'이었다. 단조로움을 넘어서 나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하루들의 연속이었다.
업무가 몰아칠 때 내내 괴로워하며, 다 치워 없애고 나면 또 미리 뭘 해 둬야 할지 고민하는 무한반복의 생활. 그리고 주말마다 날 찾아오는, 집에선 먹고 자고 TV 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무기력함.
뇌도 멈춰버렸다고 해야 할까, 생각을 하는 것 자체를 무척 귀찮아했었다. 제대로 해결도 되지 않을 사건과 사회현상을 다루는 뉴스 채널은 틀어보지조차도 않았다. 마음먹고 차분히 독서를 해보려고 해도 글씨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거나 주의가 산만해 한두 장을 넘기는 것도 무척 오래 걸렸다.
그렇게 나 스스로와 세상에 아예 관심을 꺼버린 채 평일엔 시키는 대로 하는 인조인간으로, 주말엔 줄줄 흘러내리는 슬라임으로, 내 오감(五感)이 마비되어 가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내 오감이 뭐가 어떻게 멈춰있는 건지도 몰랐었다. 아마 이번에 홀로 일본 여행을 길게 하면서 '휴식'이 내 감각을 다시 살아나게 해주고 있음을 알게 된 것 같다.
14박 15일 동안 나고야, 교토, 센코쿠-추코쿠 지방의 소도시들을 거쳐 지금은 히로시마에 와있다. 오늘이 14일째, 히로시마와 일본에서의 마지막 하루 전날이다. 여러 도시를 지나오면서 참 다양한 풍경과 날씨와 문화를 경험했다. 생에 일곱 번째 방문한 일본이지만 한 번도 글로 남겨볼 생각은 못 했던, 이 나라에 대한 매 순간의 인상에 대해 사진과 함께 적어보려 한다. 내가 느꼈던 그때의 오감(五感)을 다시 소환하면서.
§도로를 보면 외제차에 비해 국산차의 비율이 확연히 높다.
대부분 도요타, 혼다, 스즈키, 스바루와 같은 국산 브랜드와 소형차를 몬다. 물론 도쿄는 조금 예외이긴 하지만, 대도시 축에 속하는 나고야와 교토에서조차도 벤츠나 BMW를 그다지 많이 보지는 못 했다. 하긴 나고야에는 도요타시(豊田市)가 행정구역으로 따로 있을 정도이니 더욱 이해가 간다. 그들의 자국 자동차 브랜드 사랑에서 조국에 대한 긍지가 느껴질 정도이다.
§남녀노소와 날씨를 가리지 않고 자전거를 애용한다.
일본 거리를 걸을 때 자전거 타는 사람들을 볼 때 와-하고 감탄한 적이 종종 있다. 길목 하나에 일행도 아닌데 자전거가 연달아 너덧 대가 지나가는 모습. 백발노인이 선보이는 안정된 드라이빙 실력. 상하체를 모두 가리는 자전거용 우비를 입고 우천을 뚫고 가는 모습. 횡단보도와 인도에 함께 공존하는 자전거를 위한 길까지. '정말 건강하고도 효율적으로 사는 동네다.' 싶었다.
§지방 곳곳에 철도 네트워크가 편리하게 형성되어 있다.
15일 동안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면서 일본 기차하면 신칸센만 떠올렸던 나의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큰 거점끼리만 신칸센으로 이동하고 나면, 그 뒤에는 웬만한 소도시로 가는 것과 소도시 간의 이동은 일반 열차로 매우 자유롭게 할 수 있다. 특히 마쓰야마에서 다카마쓰로 갈 때 탔던 호빵맨 열차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열차 내외부 전체가 만화 호빵맨에 나오는 캐릭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심지어 운행 시작을 알리던 호빵맨 노래까지, すごい!
§소박한 작은 식당의 음식에서 주인의 장인정신이 느껴진다.
개인이 운영하는 식당과 프랜차이즈가 확연히 다르다. 음식에 기울인 정성이 역력히 티가 나고 그 개성이 살아있다. 이번 여행에서 가급적이면 개인식당을 가보려고 노력했다. 그 중에서도 이누야마성 근처에서 먹은 '은대구 정식'과 우동의 도시 다카마쓰에서 먹은 니꾸우동(にくうどん)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사케에 숙성했다는 은대구 구이는 난생 처음 맛본 생선구이의 맛이었다. '새콤하고도 달콤하다..? 응..?' 하는 짧은 새에 입에서 이미 녹아버리고 없었다. 생선을 술에 절인 후 구우면 이런 맛이 날 수 있다니.. 한 점을 입에 넣을 때마다 그 음식에 들인 아이디어와 정성에 감탄 또 감탄했다.
철길 옆에 덩그러니 있는 작은 우동가게, 문 연 지 5분도 안되었는데 이미 식당 안에 줄이 서있다. 여기저기서 면을 빨아들이는 소리도 난다. 누군가를 따라 별 고민 없이 주문한 니꾸우동, 허연 고기를 보며 '느끼하진 않으려나?' 하는 의문은 잠시. 입안에서 터지는 고기의 육즙과 우동면의 탱탱함이 나를 놀라게 했다!
§편의점은 식당이자 반찬가게이며 베이커리. 음식의 미니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몇 번을 가도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일본의 편의점. 로손, 패밀리마트, 세븐일레븐, 미니스톱 어딜 가도 눈이 즐겁다. 삼각김밥 종류는 얼핏 봐도 열 가지가 넘고 거기에 소바, 파스타, 스시까지 요리들이 전시되어 있는 듯하다. 밥이 집에 있다면 퇴근하면서 몇 개 골라갈 법한 반찬들과, 후식으로 먹을 푸딩에 빵까지. 고르는 재미와 고민이 동시에 있는 즐거운 곳이다.
§식당이나 이자카야에 주방을 마주 보는 좌석이 많은 덕에 혼밥이 즐겁다.
혼자서 식사하고 술 한잔하기에 카운터석(カウンター席)은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리고 나와 같은 혼밥, 혼술족이 옆에 나란히 앉으면 그 공간에서 잠시 동안의 동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것 같아서 좋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음식을 즐기면서 주방에서 요리하는 모습을 구경하는 것은 이 자리에서 누릴 수 있는 소소한 행복이 아닌가 싶다.
§주택가를 지나치다 보면 집주인이 누군지 궁금해진다.
'어쩜 저렇게 알록달록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을 수 있을까.' 집이 모인 골목을 지나갈 때마다 했던 생각들이다. 꽃과 풀의 종류가 집집마다 다른 것을 보면서 집주인은 과연 어떤 사람일지 호기심이 생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한 노파께서 한 손에는 물뿌리개를, 한 손에는 가위를 들고 집에서 나오시는 걸 보았다. 하얀 백발에 허리까지 굽어 여든? 아흔?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그녀에게 있어 '아침에 일어나 꽃에게 물을 주고 가꾸는 것'이 하나의 일과라는 점이 뭔가 흐뭇하고 따스하게 다가왔다.
노란 꽃을 몇 송이 잘라서 손에 쥐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신다. '친구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시나, 아니면 화병에 꽂아놓고 보시련가.' 이런 생각을 하며 봄이 마음에 와서 스미는 것엔 나이가 따로 없음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겼다. 나도 언젠간 저렇게 나이가 들 것임을 잊지 않고 주름을 받아들이되 기쁘게 살아가야지.
§개인이 명상을 위해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도처에 있다.
교토 호센인에서 700년 된 소나무를 바라보며 말차와 화과자를 음미해 본다. 시원한 다다미 바닥에 앉아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소나무를 한번 보았다가 그 너머에 우거진 풀숲과 꽃들도 한번 바라본다. 가림막이 없는 액자 모양의 창문을 통해 주위를 둘러싼 산줄기로부터 녹음(綠陰)의 향기가 실려온다. 내게 다가오는 자연이 너무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져서 마치 이 산에 기거하는 신선이 된 기분이다.
교토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 절과 정원, 신사를 심심치 않게 접할 수 있다. 꼭 차를 곁들이지 않더라도 내가 자리 잡고 앉은 곳이 '명상의 공간'이 된다. 그 자리가 편안하게 느껴지면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그저 그곳에 앉아 바라만 보기도 하고, 눈을 감고 숨만 쉬기도 하며 나 자신을 자연에 내맡길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이것저것을 보고, 이생각 저생각을 하면서 나고야에서 시작해 히로시마에까지 오고 나니 어느덧 여정의 마무리에 가까워 와있다.
그전에는 정신없이 일하다 어쩌다 낸 휴가에 관광만 했던 일본이라면, 이번엔 그 나라의 일상에 그대로 스며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는 기분이다. 그래서 이토록 여유롭게 호텔 로비에 노트북을 펴고 앉아 14일을 되돌아보는 짧은 글을 남길 수 있게 된 것이다.
회사를 쉰지도 어느덧 다섯달이 다 되어간다. 이제야 좀 나다운 생각을 하고, 나를 표현하고, 삶에서 무엇인가 느끼면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한 것 같다. 작년보다 올해 더, 올해보다 내년에 더 풍부한 사람이 되어 단단해진 마음으로 회사에 돌아가고 싶다. 그렇게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