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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이 Apr 18. 2024

이제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엄마에게 사과를 한 이후로.

 난 말을 뱉기 전에 서너 번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다 결국 내 의견은 돌려 말하거나 상대방의 제안에 수긍해버리는 편이다. 날 것 그대로의 내 생각을 정확히 전달하지 못한다. 왜 그럴까. 왜 이렇게 됐을까. 기질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K-첫째'에 따라붙는 그 망할 놈의 '책임감'때문도 있는 것 같다.


어쨌든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하고 싶은 말을 진짜 못하는 편이었다. 아니 현재진행형이라고 해야 하나, 지금은 하고 싶은 말을 잘 할 때도 있다. 연습 중이다.


유년 시절, 뭘 갖고 싶다고 사달라고 졸라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 한번 아울렛 장난감 코너를 부모님, 동생들과 지나치게 되면 그저 구경만이라도 맘껏 하고 싶어 '집에 조금 늦게 갔으면 좋겠다.' 하고 미미 인형만 한참을 만지작거렸었다. 갖고 싶은 대로 다 사줄 수 없는 형편임을 어렸던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다 네댓 살 어린 동생들의 새 장난감이 생기면 내 것은 딱히 없어도 같이 잘 갖고 놀았다.


참 집이 시끄러웠던 날이 허다했다. 아빠가 술을 자주 드셨는데, 집에 오시면 자식들 발이며 종아리를 주물러서 깨워놓고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셨다. 이미 잠이 들어버린 척해도 소용없을 때가 많았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네, 네' 다 알아들은 척 대답을 하고, 그 넋두리를 한참 듣고 나야 다시 누울 수 있었다. '싫다', '졸리다', 이런 말을 못 했다. 아빠가 화낼까 봐. 밤이 더 길어질까 봐. 그럼 나도 엄마도 동생들도 더 힘들까 봐. 그때는 그냥 '술주정'이라고 치부했었는데 한 10년을 회사원으로 살아보고 나니, 아빠도 어쩌다 보니 자식은 셋에 만만치 않았던 직장 생활이 괴로워서 그랬던 것이었으리라 십분 이해한다.



 

 위의 얘긴 별것도 아닌 셈 치고, 우리 집도 참 사연이 많았다만 그런 환경이 나뿐이었겠는가...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많았겠지. 그래도 지금은 이만하면 숨은 틔었으니 지난 일에 대한 회상은 이쯤 해야겠다.


아무튼 집에서 저러니 학교에서도 친구들에게 무조건 맞춰주는 애가 됐다. 남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부터 살피는 눈치 빠른 애였던 것이다. 하필이면 공감 능력도 좋아서 친하지도 않은데 우는 아이를 그냥 못 내버려두고 뭐가 속상한지 얘길 들어주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에는 고민 상담을 해주는 든든한 반장, 엄마같은 순이라고 불리며 또래들이 의지하는 고등학생 카운셀러가 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내 얘길 못하고 살았던 것 같다. 부모님에겐 걱정을 끼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뭐라도 되어서 남들만큼은 갖는 삶을 함께 하려고 공부도, 대학도, 취업도 혼자 끙끙 앓으며 큰딸 노릇을 했다. 친구들에겐 집안 사정, 내면의 복잡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어른' 가면을 쓰고 세상의 길을 다 알고 헤쳐 나가는 것처럼 씩씩하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언젠가부턴 완전 성격으로 굳어져서 직장에서도 밝고 활기 넘친다는 이야길 많이 들었다. 이게 쌓이고 쌓이다 보니 순이의 '이미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호의적인 사람이 되어버리고 나니 누군가의 부탁도 거절을 못 하고, 일이 너무 어렵고 많아도 힘들다고 내색을 못했다.


사실 '힘들다' 말해도 되는 건지조차도 몰랐다. 이 바보. 힘든 것이 뭔지도 측정을 못했던 수준인 것이다.

결국 중간단계 없이 '휴직'을 선택해버렸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단지 '나를 표현하는 것에 좀 더 익숙했다면 일하는 게 덜 힘들지 않았을까, 벼랑 끝으로 날 내몬 것들 중 하나가 나 자신이 아닌가' 하고 휴직 후에야 돌이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거나 죄책감을 갖지 말자고 다짐했다.




 언젠가 꼭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가 10살이나 되었을 때 일이니 이십몇 년간 케케묵었던 일이다. 집에 엄마 지인이 오셨을 때일텐데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애는 애였으니까... 뭔가 불만이 있어서 엄마와 말로 실랑이를 했던 것 같다. 씩씩대다가 대번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엄마는 나 공부도 못 알려주면서!" 였다. 엄마와 지인분이 살짝 벙찐 표정으로 "허허..." 하고 어이없어 했던 것이 그 기억의 끝이다.


그 쥐방울 같은 10살짜리가, 완전 어린 꼬마도 아니고 할 말, 못 할 말 대강의 구분은 할 나이가, 엄마 한 번 이겨보겠다고 주먹 불끈 쥐고 내질렀던 그 말이 이따금씩 기억나서 커가는 동안 내 가슴을 후벼팠다. '언젠가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해야지, 잘못했다고 말해야지.' 마음속으로 백번 천번을 망설였을 것이다.


휴직 초반, 2주 정도 본가에서 머물고 있던 어느 날 낮잠을 자고 깨어났더니, 엄마가 제일 먼저 묻는 말.

"순이야, 배 안 고파?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물음을 들음과 동시에 불현듯 옛날의 어린 순이가 뱉었던 독설이 떠올랐고 바로 그 순간 난 망설임 없이.

"엄마. 내가 열 살쯤일 때, (…)...(…)...(…)..."


뭐 먹고 싶냐고 물었을 뿐인데, 딸이 잠에서 깨자마자 한다는 말이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한 번씩 떠오를 때마다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말한다고,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엄마 미안해..!" 해버리니, 엄마는 '이게 뭔 소린가' 싶기도 한 놀란 눈을 하고 찬찬히 얘길 들어주었다.


"너 꿈꾼 거 아니냐? 난 그런 일이 기억도 안나는데.. 그게 뭐라고 맘에 담아뒀냐, 너 꿈꾼거야."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것인지 딸자식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 기억이 안 나는 척 해주는 것인지, 난 더 캐묻지 않았고 진실은 모른다. 신기하게도 엄마가 꿈이라고 해주니 그렇게 또렷했던 기억도 정말 꿈을 꿨던 게 아닌가 하고 이제는 나조차도 헷갈린다.


분명한 것은 제일 큰 마음의 짐 보따리를 하나 내려서 풀어 놓았더니, 그 이후 작은 표현들이 더 쉬워졌다는 것이다.




 이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조금 수월하게 하는 편이다.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그들이 뭐가 먹고 싶은 지만을 먼저 굳이 살피지 않고 내가 먹고 싶은 메뉴도 제안해본다. '싫으면 다른 거 먹지 뭐.' 하고.

상대를 귀찮게 할까 봐 두 번 물을 질문도 하나로 줄이려 고민을 오래 하지 않는다. '아니면 말지 뭐.' 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과하거나 부족하지 않게 조금씩 채웠다가 비웠다가' 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

그러려면 때에 맞게 '내가 하고 싶은 말', '표현하고 싶은 것'을 밖으로 꺼내놓아야 한다.


난 채우기만 하려고 어깨에 짊어진 물 양동이의 크기만 키워 놓았던 것이다. 결국 무게를 버티지 못해 그 안의 물이 크게 쏟아져 버렸고, 제일 먼저 흘러내린 것이 엄마에 대한 미안함으로, 오랜 죄책감으로 담아두었던, 눈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게 다시 적당히 작은 양동이가 주어졌다. 이제 뭘 담아놓기만 하고, 채우기만 하는 짓은 그만두려고 한다. 담았다가 쏟아내고, 채웠다가 비워내고를 반복하며 '나'를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한다.


작은 표현들을 시작하기까지, 아이러니하게도 난 거꾸로 큰 용기를 내야 했었다.

그래서 이제야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맘이 한결 가볍다. 이런 기분이구나. 정말 좋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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