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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이 May 09. 2024

커피로부터의 해방

쓴 맛으로 날 깨우지 않아도 된다. 

 매일 아침 출근 루틴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이었다. 

공복에 들이키는 커피는 '오늘 하루도 한번 가보자'하며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의식과도 같았으며,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신경안정제이면서도 온 촉각을 곤두서게 하는 신경발작제이기도 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아침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스트레스가 많을 것 같은 날은 venti 사이즈의 커피를 챙겼다. '오늘 하루도 견뎌야 한다. 흘려보내야 한다.'하며 일부러 내 입에 쓴 물을 주입시켰다. 그 쓴맛을 입에 머금었다가 목구멍으로 넘기며 내 주의를 환기시키곤 했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아 며칠 쉬어볼까 싶어 안 사 온 날이면, 어김없이 누군가가 나타나 호의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쥐여주었다. 그렇게 번번이 모닝커피를 쉬는 일은 수포로 돌아갔다. 


점심 식사 후에는 고민할 것도 없이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입가심과 동시에 식사 후 졸음퇴치제였다. 오후 시간에는 선배들이 잠시 얘기도 나눌 겸 커피 한잔 사 오지 않겠냐고 제안을 하곤 했다. 오후에 커피를 마시면 안 그래도 쉬이 찾아오지 않는 잠을 더 쫓는가 싶어서 그나마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이렇게 하루에 최소 2~3잔은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다. 메뉴에 달콤한 것들고 많고, 몸에 좋은 티 종류의 음료도 많은데.. 다른 것을 선택했을 때 입에 단맛이 남는 것과 뜨거움을 식히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점이 항상 내 신경에 거슬렸다. 그래서 내 선택은 항상 아이스 아메리카노였다. 


일을 할 때 항상 긴장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던 것 같다. 책상 안에 갇혀 있고 혼자만 하는 업무를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떤 세상에 고립되게 된다. 내가 그런 상태였던 것 같다. 


일이라는 적이 언제 어디선가라도 내 성을 쳐들어 올 것 같고, 공격이 시작되면 난 문을 걸어 잠그고 성곽의 뚫린 구멍을 찾아서 메워야 한다. 적당한 시점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면 마치 성 안이 불바다가 될 것만 같은 초조한 기분이었다.


그러니, 항상 꼴깍꼴깍 목으로 넘기기도 좋고 입에 머물렀다 이내 사라지는 쓴맛의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씁쓰름한 맛으로 나를 각성시키는 까만 물약. 


 휴직을 하고 난 뒤 한동안은 원두를 갈아 모카포트에 직접 아메리카노를 추출해 마셨다. 얼음까지 준비해 그것도 역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그러나 이내 그만두었다. 맛이 없었다. 맛도 없거니와 아침밥을 챙겨 먹기 시작했더니 굳이 모닝커피로 입맛을 떨어뜨릴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모닝커피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나의 취향이 아니라 그저 10년 동안 회사에서 길들여진 지독한 습관이었을 뿐임을 몸소 확인했다.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물부터 반잔 마시고 시작한다. 밤새 잠을 자며 위아래로 쫙 붙은 입속과 오그라든 목구멍에 물길을 틔우는 기분 좋은 모닝 루틴이다. 예전에는 물도 마시지 않고 부리나케 차를 몰고 출근해 처음으로 입에 대는 액체가 커피였다. 왜 그렇게까지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며 나는 회사를 다녔던가. 


습관에서 벗어나기가 쉽진 않듯, 어쩌다 한번 카페에 가도 여전히 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지만 이제는 한 잔을 채 다 마시지 못한다. 내 몸 안의 일하는 부품들이 쉬고 있기 때문에 커피라는 윤활유가 많이 필요하지 않나 보다. 굳이 쓴맛을 음미하며 나를 깨우지 않아도 충분히 평온한 상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이 시간이 다 끝나고 회사에 돌아가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또다시 아침마다 커피를 한잔 손에 쥐고 출근해야 하나? 몸에 까만 물약을 들이붓고 장기들더러 오늘 하루도 생각을 하고 열심히 일하라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이 습관의 고리를 끊은 채로 나중에 회사에 돌아가려 한다. 커피를 준비하지 않아도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새 습관을 들이려고 한다. 어떤 행위나 음료를 통해 일부러 내 감각을 깨우지 않아도 보이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하루를 시작하는 습관.


 몇 달에 걸친 휴직 기간 동안 더디지만 하나씩 좋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모닝커피를 끊고 스스로 밥을 차려먹고 산책을 하며 공기를 마시고, 가족들과의 시간을 즐겁고 소중하게 여기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내가 찾아야 했던 원래의 내 모습, 내 일상에 정착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휴직의 종점은 나만의 일상에 완전히 정착해 뿌리를 내린 채로 돌아가는 것이다. 회사에만 매몰되지 않고 나만의 사고방식, 생활양식을 유지하며 스트레스도 풀 줄 알고 삶을 즐길 줄 아는 순이가 되어.



와인 잔에 마시는 TWG Tea 맛은 어떨까? 일상 중 새로운 발상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는 요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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