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정기념당과 융캉제
두달 동안 정말 그저 맘가는대로 자고 먹고 놀았다.
(뒹굴뒹굴)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예전보다 잠도 잘 오고,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하루종일 책을 읽을 에너지가 생겼다.
그러다 문득 오랜만에 덜컥 겁이 났다.
'회사에 복귀해서 일이 다시 버겁게 느껴지면 지금을 떠올릴텐데, 그저 집에서 잠만보처럼 구르던 기억만 있으면 어떡하지.'
나는 스스로를 좀 더 밖으로 내몰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이 귀한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 된다.
뭐라도 해야 한다.
그래서 2월이 가고 3월이 오자마자. 난 대만행 항공권을 열흘 남기고 질러버렸다.
원래 계획이 어느 정도 세워져있지 않으면 잘 움직이지.. 아니 ‘못’ 움직이는 편이다.
역시 괜한 짓인가.. 싶었을 때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다녀와서 일이 더 힘들까봐, 쉬는 날 전화나 메신저가 오는게 끔찍히도 싫어서 고민만 하다 결국 연차를 쓰지 못했던 ’그.때.처.럼. 이번에도 너 그럴거냐? 넌 지금 뭐가 걱정이냐?‘
더 생각할 게 없었다. "아니? 걱정 없지." 하고 무심하게 항공권 결제를 마쳐버렸다.
3월 11일 월요일 새벽 5시 30분, 인천공항 도착.
아침 8시, 타이베이로 떠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지금부터 꽉 찬 4박5일의 홀로 대만 여행을 떠난다.
'회사 쉬는 동안 뭐라도 하나 더 하고, 안 가본 곳 하나라도 더 가보자.'
그렇게 이른 낮에 도착한 대만은 일기예보대로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아직은 잘 모르는 이 나라야, 나의 첫 대만. 안녕! 앞으로 5일 동안 잘 부탁해.'
근데 왜 난 다른 나라를 다 제쳐두고 대만을 선택했을까?
그냥 '딤섬이 먹고 싶어서'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먹을 기회는 많지만, 그 나라에 가서 먹는 현지의 딤섬.
휴직을 결정할 때 쉬는 동안 그저 하고 싶은 건 망설이지 않고 다 해보기로 했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남의 시선 신경쓰지 않고, 마음 가는대로 할 수 있는 건 하나씩 해보자고.
그게 큰일이던, 사소한 일이던.
그래, 일단.. 그렇게 먹고 싶었던 딤섬으로 무난하게 시작해볼까.
먹고 싶은 딤섬 종류가 참 많았지만, 첫 식사는 가볍게 즐기기로 한다.
통새우살이 씹히는 하가우와 꼬들한 식감의 볶음면은 내가 이 곳 타이베이에 왔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사실 난 대만을 잘 모른다. 부끄럽게도, 여태까지 세상일에 관심을 안 두고 살았다.
세상에 원래 있으면 있는 거고, 뭐가 바뀌면 바뀌는 거고.
그래서 '대만이 대만이지 뭐' 이런 마인드였다. 대만이 그냥 어쩌다보니 중국에서 독립했나 보다 하고.
회사를 쉬면서 많이 바뀐 부분은 조금씩 세계 역사를 알아가는 재미를 붙였다는 것이다.
중화민국, 자유중국, 지금의 대만이라는 국가를 이르는 명칭들이다.
장제스(국민당)는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중국공산당)에 패하여 1949년 이 곳 대만으로 정부를 옮기고 1975년까지 1~5대 총통을 지낸 인물이라고 한다.
매시간 정각, 10여 분의 위병 교대식은 고요하면서도 절도가 넘친다, 동작과 걸음 하나하나에 그에 대한 존경을 담아서 표현하듯이.
중국과 대만 사이에는 항상 흡수와 독립 이슈가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와 더 많은 이들이 대만을 '하나의 나라'로서 경험해볼 수 있길 바란다.
(세계에 다양한 문화와 나라가 존재하는 건, 인류가 보물을 하나 더 남기는 셈이라고 생각하므로.)
중정기념관에 방문해 장제스의 생애와 대만의 건국의 짧은 역사를 이해하게 된 것은 꽤 괜찮은 첫걸음이었다.
첫날이니 무리하지 않기로 한다. 융캉제의 아무 카페에 앉아서 잠시 쉬어볼까.
새로운 걸 보고 싶어서 찾아온 대만이니 뻔한 아메리카노 대신 흑당 진주 밀크티를 주문하기로 한다.
찐득한 펄을 씹을 때마다 배어 나오는 흑당 맛을 느끼고 살짝 놀라웠다.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히 달달하고 그윽한 향과 맛! 이게 진짜 진주 밀크티구나!
부드럽고 쫀쫀한 펄에서 배어나오던 흑당 맛이 아직도 입에서 맴돈다.
융캉제엔 아기자기한 소품샵들이 구경하기 참 좋다.
이것저것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참을 忍, 忍, 忍...! 마음 속으로 백 번은 썼으리라.
비가 오면 오는대로 걸어보는 융캉제는 꼭 여행책에서만 보던 맑은 날이 아니어서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종류 별로 진열해놓은 색색깔의 생과일 주스도, 식당 유리창에 걸려있는 붉은 빛의 닭고기도,
내일 찾아와 편지를 부칠 이를 비를 맞으며 기다리는 빨간 우체통도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고 새롭다.
예전부터 이 곳에 존재했던 일상적인 것들일텐데,
홀가분한 여행이 처음인 낯선 이에게 대만이 안녕! 잘 왔어! 해주는 것 같았다.
첫날 밤 호텔 방에 누워 다시 한 번 생각했다.
회사를 쉬기를 잘 했다고. 참 잘 했다고. 나에겐 이런 시간이 필요했다고.
모든 사물이 새로와 보이고, 이색적인 공기를 들이마시며 온전히 홀로 있어보는 시간.
그리고 추억과 풍경을 눈과 마음에 가득 담아서 돌아가자고.
아기자기한 호텔 방 벽에 붙은 여러 개의 봉투에는 각자 다른 메시지를 담은 카드가 들어있다.
마치 포춘쿠키 같다. 처음 뽑아 든 카드에 적힌 글귀.
꼭 나에게 해주는 말인 것 같다.
Don't get caught up in your emot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