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의 마침표, 공주.
"선생님, 내일부터 방학이니까 편하게 쉬다 와요."
새로운 미술학원에서 일한 지 4개월이 되어갑니다. 마침, 연말을 맞아 3일간의 겨울 방학이 주어졌어요. 흘러간 시간만큼 끝 페이지를 향해있는 일기장을 펼쳐봅니다. 아무것도 몰라 한참을 헤매다가도 끝내 목적지에 다다라 웃음을 지었던 날들이 선명합니다. 낯설고도 조촐한 하루 동안의 여정을 다녀오기로 했어요. 그곳에서 12월 끝자락, 마침표를 찍어보고자 합니다.
플래너와 일기장, 스케치북과 필통, 빠질 수 없는 이어폰까지. 더 챙길까 했지만 이내 뻗은 손을 거두고 짐을 덜어냅니다. 욕심을 부리면 마음도 무거워지니까요. 목적지는 공주, 본가에서 버스로 1시간 10분 정도가 걸리는 곳입니다. 시간이 남아 빨래방에 들리기로 했어요. 묵은 때가 가득한 이불을 세탁기 안에 넣으니 거침없이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지켜보는 중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어요.
"오늘 가지 말지 그래. 귀찮지 않아?"
저희 아빠입니다. 걱정돼서 괜히 한 소리 하는 거란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여행이나 사색이나 내가 좋아하는 건 다 아빠 닮아서 그러는 거야."
그런 거겠지요.
한 시간 정도가 흘러 말끔해진 이불을 꺼내는데 아빠가 뜬금없는 제안을 합니다.
"안 되겠다. 가는 데까지 데려다줄게."
이미 차 예매까지 해놨는데 무슨 소리냐며 실랑이를 벌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수백 번 하지만 도저히 듣지 않아요. 데려다준 아빠를 그대로 보낼 수 없어 공주에서의 한 끼를 같이 하기로 합니다.
"아빠, 내가 원래 브런치 먹으려고 했거든? 그거 어때?"
"그 뭐냐, 그 샌드위치 코딱지만큼 나오는 거?"
예상했던 반응에 급하게 인터넷을 켰어요. 마침내 빠르게 내려가던 엄지손가락이 멈췄습니다. '어탕수제비' 어쩌면 우리에게 더 딱 맞는 음식일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수제비는 사색에 안 어울리지 않나?"
"그렇게 말하는 아빠도 사실 브런치보다 수제비가 더 좋지?"
생각지도 못했던 함께. 생각지도 않았던 메뉴. 첫 출발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공주는 학생 때 이후 처음입니다. 몇 번은 체험학습으로, 또 한번은 열여섯 사춘기를 보내며 왔지요. 당시 만화 전공을 준비하던 저는 패션디자인을 하고 싶었어요. 오랫동안 옷 장사를 했던 부모님이기에 그런 딸을 보고 생각나는 인맥이 있었을 겁니다. 아빠는 공주의 한 도넛집으로 저를 데려갔어요. 알고 보니 같이 옷 가게를 했던 사장님께서 운영하고 계신 매장이었죠. 패션 회사에 다니던 따님분의 조언도 들어보고요. 꽤 오랜 시간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목적지에 다 와 가니 아빠도 그 생각이 난 걸까요?
"여기 도넛집 바로 근처네. 어...? 아이고.. 여기 없어졌구나."
옷 가게에서 화장품 가게로. 다시 화장품 가게에서 옷 가게로. 매번 무엇을 해야 할지 머리를 싸매던 부모님이었어요. 먹고 살아야 할 방법과 고민으로 매 순간을 싸우던 날들이 우리에게만 적용되지는 않았겠지요. 새로움을 찾아 들어온 곳에서 사라진 추억 한 편을 만났습니다. 씁쓸하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든 듯 쓴 한숨을 뱉어냈어요.
좁은 골목에 주차 후 식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은 없었어요.
"대전에서 오셨다고요?"
어색하고 멋쩍은 인사 뒤에 곧 반찬 4종과 뚝배기에 가득 담긴 수제비가 나왔어요. 직접 수저까지 놔주시는 걸 보고 주춤주춤하다가 한 마디를 던졌습니다.
"사장님, 어탕이 생선을 갈아서 만드신 거죠?"
"네, 맛있으니 드셔보세요. 밥도 마음껏 퍼 드시면 돼요."
이어 한 숟갈을 뜨려는데, 앞에서 찰칵찰칵 소리가 멈추지 않습니다.
"아빠, 그만 찍고 어서 먹어."
"야 이거, 사진이 조금 별론데 다시 찍어볼래?"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나서야 숟가락을 듭니다.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가 맛있던 점심이였어요.
배부른 한 끼를 먹고 나니 다시 혼자가 되었습니다. 처음의 계획대로 돌아갔지만 왜인지 꽤 어색합니다. 생각을 비우기 위해 주변을 걸었어요. 이제 제대로 주변을 탐색할 시간이었죠. 이곳에는 도심을 흐르는 생태하천, 제민천이 있습니다. 길을 따라 걸으니, 마음이 잔잔해지기 시작해요. 한산하고, 차분한 거리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지요. 동네 가득 묻어있는 옛스러움이 참 좋아요. 마음이 홀려 한참을 산책하다가 다음 목적지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제민천 옆에 위치한 동네책방 입니다. 2층까지는 카페로, 3층은 책방으로 운영되는 곳이에요. 독특한 건물이 예뻐 이리저리 사진을 찍다가 3층 계단으로 올라갔어요. 조심스레 문을 열면 새로운 공간이 펼쳐집니다. 작은 계단을 올라가니 아늑한 다락방도 나타났어요. 햇살을 따라 느긋한 여유를 부려봅니다. 집에 쉽게 놓을 수 없는 푹신한 소파 위에도 앉아보고요. 제한이 없는 공상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한때 다락방이 있는 집을 짓고 싶었지요. 소파와 램프, 빈티지한 러그는 상상 속 필수입니다. 애정이 깃든 공간에서 좋아하는 일을 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초대하기도 하는 그런 날. 다락방 안에서 잠시 그런 꿈을 꿨습니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나가려던 중, 헤프닝이 벌어졌습니다. 잠시 들린 화장실에서 핸드폰이 방전됩니다. 온도 변화로 인한 것일까요. 잘만 작동하던 것이 켜지지 않아 당황했어요. 저의 부주의로 화장실 문까지 열리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당겨도 꿈적하지 않아 문을 두드렸어요. 다행히 밖에 소리가 닿아 사람을 부르러 가신 듯했습니다. 한동안 먹통이던 핸드폰도 시간이 지나니 원래대로 돌아왔지요. 밖에 나오니 다리가 풀렸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도 꽤 신선했어요. 다시 정신을 차리고 길을 나섰지요.
기와지붕을 따라 고즈넉한 분위기가 돋보이는 카페로 들어갔습니다. 한결같은 취향이 이끈 곳, 이곳은 카페 <송원>입니다. 공주에는 밤이 유명하다고 해요. 그만큼 밤 마들렌을 먹어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품절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몇 개의 테이블이 꽉 차 있습니다. 서둘러 2층 구석에 자리를 잡았지요. 좌식인지라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점이 정겹습니다. 눈에 띄는 건 창문 너머로 빼곡히 들어서 있는 가옥이에요. 저 멀리 보이는 집들에도 주인이 있겠지요. 지금 이 시각은 내가 모르는 누군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을 거고요. 한 해의 마지막이 모두에게 무사히 지나가도록 바랐어요. 탈 없이 견뎌 내일을 맞이하게끔 말입니다. 그렇게 일기 몇 줄을 쓰고, 그림 몇 장을 그리며 창밖을 내다봅니다. 주변의 말소리가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반복할수록 하늘도 깜깜해졌어요.
충전해 둔 온기 덕분에 찬바람을 맞설 힘이 생겼습니다. 15분 정도를 기다려 터미널로 가는 500번 버스를 탔어요. 짧았던 여행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은 고단하기보다 시원합니다. 변수의 연속이었지만, 예상 밖의 상황 속에서 나름 길을 찾아가기를 성공한 듯합니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왜 간 거야?"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이와 비슷한 의문을 가지게 될 날이 올까 홀로 생각해 봤습니다. 나의 길이라고 선택한 방향에 "왜 하기 시작한 거지?"라는 물음표를 띄울 순간이요. 한 해의 끝에서 처음으로, 다시 나아가야 할 지금. 끝을 알 수 없어 이리저리 헤매는 날들도 가득할 거라 예상합니다. 그럼에도 결국은 나와 맞는 길을 찾아갈 것이라 믿으니까요. 때로 혼자라는 사실에 힘이 부칠 때면 주변을 살펴보면서 가기로 해요. 함께할 수 있는 이에게 몸을 기대기도 하면서요. 어쩔 수 없이 변수가 가득한 삶을 지나며 또 다른 기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헤매더라도 멈추지는 말자. 오늘의 답을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