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페이지, 구례
어릴 적 기찻길을 발견하면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언제올지 모르는 기차를 기다리며 눈을 떼지 못하던 꼬마였어요. 마침내 저 멀리 오는 기차를 보면 한 마디를 내뱉습니다.
"어, 기차온다!"
말 끝나기가 무섭게 사라진 기차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그 날 꼬마는 아쉬움을 가득안고 다짐을 했어요. 어른이 되면 기차 여행을 떠나겠다는 꽤나 소박한 다짐입니다. 충분한 시간이 흘렀지만 생각처럼 다짐을 이룰 기회는 많이 없었어요. 어느새 저에게 기차란 혼자타기에는 조금 어색한 교통수단으로 남았습니다.
한파가 기승을 부리는 1월, 늦게나마 어릴 적 목표를 실행할 날이 왔습니다. 목적지는 구례. 전라남도 북동부에 위치한 곳으로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여행지에요. 우리나라의 정서와 자연이 그대로 담겨있는 곳, 왠지 이런 곳에 마음이 갑니다. 꽤 멀리 위치한 구례에 가기 위해선 꼼짝없이 기차안에서 2시간 반정도를 보내야했어요. 부끄럽지만 기차표를 예매하는데 어쩐지 무서워져서 고민을 수없이 했지요. 기차를 탈 때는 꼭 누군가와 함께해서 그 뒤를 따라가기마련이었으니. 출발하지도 않은 길에 걱정이 가득했습니다.
토요일 아침 9시. 기차가 들어오기까지 10분정도가 남았습니다. 괜시리 플랫폼 주변을 왔다갔다 하니 기차가 들어섰어요. 차창밖은 녹지 않은 눈들로 가득한 영락없는 겨울이면서도 기차 안은 꽉 채워진 사람들의 열기로 따뜻했습니다. 가져온 노트를 펼치기가 애매해 가만히 창 밖을 구경해봐요. 여긴 어디쯤일지, 그때그때 바뀌는 풍경에 시선을 고정합니다. 저 사람들은 어딜 가는 거지? 여기에 사는 거겠지? 하고 알지 못하는 무언가에 의미를 둬요.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한쪽에서 떠들석한 소리가 들려왔어요. 어딘가 경직되있던 조용한 분위기와는 다른 그림입니다. 고개를 들어보니 의자를 돌려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어르신들이 보였어요. 그 모습을 보니 뭔가 안심이 됩니다. 기차 안에서 삶은 계란 하나를 나눠먹던 친구들과의 추억이 떠올랐을까요, 어릴 적 상상하던 기차여행의 모습과 겹쳐서일까요. 내심 어색한 분위기에 긴장되있던 어깨가 풀립니다. 적당한 소음을 라디오 삼아 남은 시간을 맡겼습니다.
오전 11시 20분, 내려서 본 구례의 하늘은 맑았습니다. 파랗고 쨍한 간판이 돋보이는 구례역의 모습도 하늘을 닮아있었어요. 나오자 마자 버스 정류장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는데, 딱히 재미있는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줄지않는 버스를 기다리다 결국 택시를 불러 구례읍까지 향했지요. 도착하여 임시휴무라는 표지판을 맞닦뜨렸을 땐, 적잖이 당황했어요. 두번째 계획이 존재하지 않는 여정이었죠. 주변을 살피며 발걸음을 옮기다가 들어간 곳은 평범한 김밥집입니다. 동네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정겨운 김밥집이였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니 테이블 여러곳에 카레와 짜장면 그릇이 세팅되어 있습니다.
"사장님, 어.. 식사 되는 거 맞나요?"
단체손님이 오는지 매우 바빠보이시는 사장님께 소심한 말 한마디를 건넸어요. 어느곳에서 먹어도 감탄하는 게 바로 김밥입니다. 뚝딱 쌀 것 같지만 보이는 것처럼 맛과 모양새를 잡는 게 여간 쉽지 않다고 했어요. 늘 옆구리 터진 김밥에 미간을 찌푸리던 아빠가 그랬듯이. 평소라면 금방 해치웠을 김밥 한 줄을 오래 씹고, 깊이 음미해봅니다.
든든히 채운 배로 15분간의 산책을 즐기기로 합니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동안 더 파래진 하늘이 눈에 띄었어요. 구름을 따라 뻗어있는 산이 유난히 선명해서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습니다. 핸드폰 지도 하나에 온 마음을 의지하며 여차저차 나선 길. 쨍한 벽화가 그려진 낮은 담장이 보이면 마침내 도착입니다. <독립서점, 책방 로파이>
영상과 사진으로만 보던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지니 가슴이 뛰기 시작해요. 이곳을 위해 왔다고해도 무방할 정도로. 마루에서 책을 읽고있던 사장님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오늘의 첫 손님이 된걸까요, 문을 열어 나타난 아늑한 방에 난로를 틀어주셨어요. 잔잔한 라디오와 손수적은 메뉴판까지, 모든 분위기가 공간과 딱 맞아 떨어지는 이 순간에 희열이 느껴집니다.
빈티지한 주전자 안을 열어보니 작두콩차의 향이 한움큼 올라와요. 따뜻한 차를 마시며 가지런히 놓인 책들을 구경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모르지만 끌리는 책 한권을 골라 방석 위에 자리를 잡아요.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나만의 시간을 갖습니다. 이것만으로 닫혀있던 마음에 조금의 틈이 생기는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나니 다른 손님 두 분이 들어오셨지요. 진한 커피향을 공유하는 사이 구례의 오후가 흘러갑니다.
잠시 다른 세상에 있었던 듯 기분이 몽글몽글해집니다. 다시 10분 정도를 걸어 다음 목적지로 향해요. '산 아래 우리 밀', 카페 <사나래밀>입니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동네지만, 인기가 많아 금방 자리가 차는 곳이었어요. 생강차와 마들렌을 주문하고는 햇살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 짐을 내려놨습니다. 원목 가구들 사이로 수많은 사진기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흘러간 세월을 얼마나 많이 담아냈을지 홀로 생각하는데 손님이 왔습니다.
"여기 카메라가 엄청 많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나드리를 온걸까요, 똘망똘망한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어요. 테이블이 가득차는만큼 다양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일부러 귀를 기울인 건 아니지만 좁은 공간에 각자의 사연이 잔잔히 늘어납니다. 중년부부의 육아에 관한 토론, 엄마와 자매들간의 여행, 할머니 할아버지의 목소리로 알 수 있는 사랑. 그 사이 저는 어떤 사연을 흘려보내고 왔을까요.
다시 걸었던 길 위에서 여러 생명체를 만났습니다. 풀숲을 돌아다니는 닭, 빠르게 지나쳐가던 길고양이, 그 중 구례의 여정에서 가장 애정을 둔 아이는 따로 있습니다. 가려던 소품샵이 문을 닫아 바로 근처에 있던 카페를 방문할 수 밖에 없었지요. 주유소 옆에 위치한 이곳은 카페 <로피>입니다. 안에서 만난 강아지 두부는 먼 타지에서 온 저를 반갑게 맞아줬어요. 오늘이 아니면 아마 볼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내색하지 않지만 한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눈길을 쉬이 거두지 못했어요. 그렇게 얼어붙은 몸을 녹이며 이곳에서 앞으로의 여정을 정리해봤습니다.
구례에서 가져가는 것은 딱 두가지였지요. 올리브 치즈 식빵과 시집 한 권입니다. 가방을 열어보니 빵의 향기가 가득 베어있습니다. 맛있는 냄새에 미소가 지어질 수 밖에 없었어요. 반나절을 보내는 동안, 저에게도 구례의 향이 베었겠지요.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는 순간은 꼭 어릴 때와 같았어요. 막상 나서보니 잊고있던 설렘이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부딪히고 도전하는 길에 때로는 슬픔과 고통도 함께 존재하겠지요. 몰랐던 세계에 발을 들일수록 감당해야하는 두려움도 클 거에요. 완벽하기 바라는 마음은 나를 다시 시작점으로 데려다 놓으니까요. 하지만 부딪혀서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과정이 마냥 나쁘진 않습니다. 진짜 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직면해가는 여정을 좋아하게 되었으니까요. 누군가 오늘의 여정이 어땠느냐고 묻는다면 이 한마디도 확실하게 할 수 있겠어요.
"다음엔 기차 혼자 탈 수 있겠다."
부딪혀보면 별 일 아님을. 오늘의 답을 적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