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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터기 Apr 25. 2024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그 사람 알아버리면 (1) 

   그 사람 알아버리면 1 >               그루터기            



1. 소원     


나는 주일 예배를 드린 후 교회에 따로 식당이 없어 사택 거실에서 점심 식사를 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아!”     

컵을 식탁에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목사님의 화난 목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밥만 조용히 먹었다. 중학생인 나에게 그날은 각인됐다.     

‘목사님과 사모님은 싸우셔도 저렇게 싸우구나!

그때부터였다.


“나는 기필코 저런 행복한 가정을 이루리라”     


내가 사랑하는 아빠는 담배는 안 했지만 술을 너무 사랑했다. 엄마는 간경화로 돌아가신 아빠의 장례를 치루면서 밭두렁, 논두렁, 화장실, 창고 곳곳에서 술병을 찾았다.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술을 먹지 않는 사람이어야해!’     

어린 나이였지만 먼훗날 내 짝꿍이 될 사람을 어렴풋이나마 그리고 있었다.

키가 175센치 이상이어야 하고 쌍꺼풀은 없어야 하고 너무 마르지는 않았으면 하는 외모에 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 후회가 된다.)

그런 것들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데 중요한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까?     

술을 드시지 않으면 자상했던 아빠를 보면서 술을 안먹는 사람이 내 짝꿍이 되길 소원했다.


옵션으로 내 짝꿍은 절대 이런 사람은 아니었으면 했다. 행동보다 말이 앞서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기를, 남자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하면서 허세와 허풍이 몸에 벤 사람은 아니길,  비위를 맞추느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자주 하는 느끼한 사람이 아니기를 소원했다.     



2.호기심     


“지금 몇 시지?”

“12시 50분”

“내가 너한테 물어봤어?”

내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나는 그냥 H가 몇시냐고 물어봐서 대답한 것뿐 인데 너무 무안해서 엎드려 울었다. 

이때부터 H는 나한테 호기심이 생겼다고 했다. 별스럽기도 하지.     


그해 어느 토요일 나는 벌통이 있는 밭두렁 사이를 걸어가다가 꿀벌들에게 습격을 당했다.

“아빠! 아빠! 아빠!” 

소리 지르며 집 대문까지 단발머리를 흔들며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뛰었다.

이미 머리카락 속으로 꿀벌이 들어가서 내 머리를 쏘고 있었다.

아빠는 머릿속에 숨어있는 벌들을 떼어내면서 괜찮냐고 연신 물었다. 

     

꿀벌에 쏘인 다음날 H에게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그루터기 집에 있나요?”

“누구여! 누군지 말 안 하면 안 바꿔줘!!”

“김 정자 환자 둘째 아들 H 입니다!”

“아 그려? 정수 마을 사는?”

꿀벌에 쏘여 열이 나서 교회 가지 못한 날 H는 우리 집에 겁도 없이 전화를 했다.     


H의 특기는 ‘참기’다. 

젊을 때 교통사고를 당한 아버지로 인해 H의 어머님은 일찍이 가장이 되었다. 

둘째 아들이었던 착한 H는 10대 시절 학교가 끝나고 친구들은 모여 놀기에 바빴지만 궂은 집안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H야! H야! H야!” 다급하게 형이 불렀다. 다른 방에 있던 H는 달려갔다.

“텔레비젼 옆에 리모컨 좀 줘!”    

 

이제는 내 짝꿍이 된 H가 소리 지른다.

“구름아! 구름아! 아빠 리모컨 좀 갖다줘” 

구름이는 우리집 반려견이다. 옆에 듣고 있던 나는 “으이구!” 웃으며 소파에 세상 편한 자세로 누워있는 짝꿍에게 리모컨을 건낸다.     


3. 말 하는 대로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은 연세가 있는 남자분이었다.

선생님은 ‘첫인상’에 대한 주제를 가지고 토론을 하라고 분단별로 정해줬다.

난 첫인상보다는 서로 겪어가면서 판단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외모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정해주신 우리 분단은 ‘첫인상은 중요하다’였다. 내 진짜 생각은 따로 있었지만 나는 첫인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얘기했다.

입으로 뱉고 나니 그 말이 곧 내 생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가 말하고 내가 설득당한 느낌이랄까.      


J라는 사람은 삼성 반도체 연구소에서 근무할 때 만났다. 스펙이 대단한 분들로 가득한 곳이었는데 J도 그중 하나다. 키가 크고 등치가 꽤 있고, 안경을 썼으며, 부드러운 말투와 세심함이 느껴지는 분이었다. 그분의 첫인상은 마음이 넓고 친절한 분이리라 생각했다.   

  

P라는 사람은 연세가 있고 서울대를 나왔으며, 외국인과 능수능란하게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유능한 분이다. P는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고, 고생 없이 유복하게 자라 자존감이 높다 못해 교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디까지 내 시선에서 말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속담이 있다. 앞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 코끼리를 만지게 했을 때 저마다 다른 부분을 만지고서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일부분을 알 뿐인데 전체를 아는 것처럼 오판하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첫인상’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가까웠다.   

   

내 소원대로 내 짝꿍 H는 술을 먹지 않지만 내 앞에서는 수다쟁이가 된다. 

토라져 있는 나에게 자주 느끼한 멘트를 날리며 웃게 한다. 하나 밖에 없는 명품 신발을 선물 받고 신을 때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쁘지? 이쁘지?’ 강요하듯 반복해 묻는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지안이 자신을 감청한 사실을 알고 난 후 박동훈과 나눈 대화다.     

“내가 정말 안 미운가”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 알아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널 알아”     


지금까지 삶을 사는 동안 알아버린 사람.

짝꿍이 내게 있다. 내가 알아버린 H가 누군가에겐 수다쟁이처럼 들릴 수도 있다. 

명품이나 좋아하는 허세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어느 사람에게는 느끼한 중년의 남자로 스쳐 갈 수도 있다.     

아무래도 괜찮다. 


내가 그 사람을 알아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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