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피디스켓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께 졸라 컴퓨터 학원에 등록하고 한 달 정도 다녔습니다. GW-BASIC 프로그램을 배우는 과정이었는데, 컴퓨터라는 것도 처음 보는 거라 매우 신기했습니다. 컴퓨터 스위치를 켜면 브라운관 모니터에 바로 베이직 화면이 나오고, 커서가 입력을 기다리며 깜빡거렸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내게 요구하는 듯한 모습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베이식 프로그램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For-Next, Print, Run, Del 같은 명령어들은 생소했지만, 규칙에 따라 코딩을 해야 맞는 결과물이 출력되는 언어였습니다. 구구단 코딩은 단순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번호순으로 1라인씩 문장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처리하여 결과를 화면에 출력해 보여주는 것이었다. 변수를 I와 J로 만들고, I는 단 이름을, J는 1부터 9까지 증가하면서 I단에 곱해지는 문장을 설정했습니다. I가 9단, J가 9일 때 결과를 출력하고, 반복문을 멈추는 코딩이었습니다.
또 다른 과제는 화면에 화려하게 움직이는 태풍 모양을 출력하는 것이었는데, 수학 함수와 일정 수까지 증가하는 루프(반복) 문을 사용하며, 실행 중에 비프음을 동시에 출력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 모양도 색이 변하도록 설정하는 것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정말 호기심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에 PC는 매우 비쌌는데, 삼보컴퓨가 290~300만 원 정도 해서 장학퀴즈 우수상품이나 혼수품이었다. 큰형이 고등학교 졸업 후 취업하여 본체와 키보드가 있는 일체형 컴퓨터를 집에 가져왔습니다. 형 또한 PC에 관심이 많아 파리 탈출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플로피 디스켓이 없어서 음악 테이프를 카세트에 넣고 재생시켜 PC로 베이식 코딩 프로그램을 로드한 후 RUN을 실행시키면, 블록 모양의 감옥이 생기고 파리가 대기하는 화면이 나타났습니다. 화살표 키를 움직여 파리가 벽을 피해 목표 지점으로 이동하면 끝나는 게임이었죠. 모니터도 없어서 브라운관 TV를 본체에 연결해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면 베이식 화면이 나타났습니다. 케이블을 연결하지 않았는데도 컴퓨터 화면이 TV에서 나오니 정말 신기했습니다.
DOS(DISK OPERATING SYSTEM)라는 운영체제를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가 만들어 배포하면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플로피 디스크를 드라이브에 넣고 PC를 켜면 드라이브의 LED 표시창에 녹색 불이 들어오면서 부팅 프로그램이 PC 본체로 로드되고 DOS 화면이 나타났습니다. 여전히 커서가 입력을 기다리며 깜빡이고 있었죠.
A:dir을 입력한 후 엔터를 치면 플로피 디스크 A에 저장된 프로그램 목록이 나왔고, 베이식. EXE를 입력하고 엔터를 치면 베이식 화면이 실행되었습니다. HWP.EXE를 입력하면 아래아한글 1.52판이 실행되어 한글 문서 편집 화면이 나왔습니다. PC를 사용하려면 플로피 디스켓을 항상 가지고 다녀야 했고, 부팅용 디스크와 한글 디스크 두 장을 항시 가지고 다녔습니다. 아래아 한글이 정말 놀라웠던 것은, 블록 설정 후 글자 크기, 이탤릭체, 진하게, 밑줄 설정 등을 한 번에 할 수 있고, 그 결과를 화면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 하나워드나 보석글, 훈민정음, 워드패드도 있었지만, 이렇게 다양한 기능을 한 번에 제공하는 것은 한글뿐이었습니다.
학교 과제도 전산실에서 용지가 쭉 이어져 있는 종이를 양쪽의 구멍에 잘 맞춰 PC에서 프린트 명령을 내리면 프린트 헤드가 먹지를 때리며 반 줄씩 써 나갔습니다. 보통 리포트는 종이에 직접 써내는 과제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프린터로 출력하여 제출했습니다. 타자 입력이 빠른 친구들은 빠른 시간 안에 과제를 해결했죠. 다행히 저는 글씨를 잘 못 썼지만 프린터가 단번에 해결해 주었습니다.
이후 하드디스크가 탑재된 PC가 나오면서 과제 파일만 디스크에 담아 가지고 다니면 되었습니다. 디스켓은 탄성이 있고 원형 디스크가 플라스틱 사각 주머니 안에 있어, 구겨지거나 자성 물질에 닿을 경우 데이터 손실 위험이 있어 휴대하기에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단단한 케이스에 넣어 다니곤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 삼보컴퓨터에서 윈도즈 3.1, 인터넷, 한글 강의를 무료로 시민들에게 해주는 행사를 했는데, 저도 참여했습니다. 드디어 운영체제를 그래픽 화면을 통해 제어하고 운영할 수 있었으며, 글자가 아닌 그림으로도 프로그램을 작동시킬 수 있어, 누구나 쉽게 PC를 접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PC 운영의 놀라운 변화였죠. 글자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도 마우스를 이용해 클릭으로 프로그램을 쉽게 검색, 선택,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넷스케이프 브라우저에 IP 주소를 입력하면 청와대 홈페이지, 중앙일보 신문을 종이가 아닌 화면으로 볼 수 있어서 정말 놀라웠습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백악관, TIMES 등 세계의 정보를 주소만 있으면 확인할 수 있었고, 야후, 라이코스, 익스플로러, 다음, 네이버, 한미르, 싸이월드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와 최신 자료를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 내 컴퓨터 공학과 학생들이 타 학과 학생들에게 무료로 전산 교육을 해주었는데, 저도 방과 후 공학관으로 가서 아래아한글 1.52와 윈도즈를 배웠습니다. 컴공과 학생들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며, 점점 한글과 윈도에 빠져들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워드패드도 있었지만, 한글과 컴퓨터에서 개발한 아래아한글(이찬진)은 한국인의 손에 맞춰진 워드프로세서로, 그 기술력에 놀랐습니다. 당시 관공서에서는 하나워드, 대기업에서는 보석글이나 훈민정음 등이 문서 작성에 사용되었으나, 이후 기능이 더 좋은 아래아한글이 도입되면서 문서 작성의 신세계를 열었습니다. 워드프로세서의 기본 기능은 외부 문서를 불러와 편집하고, 저장하고, 출력하는 것이었고, 다양한 서체 제공이 부족했지만, 한글은 이를 뛰어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후 외국의 대형 소프트웨어 회사의 공세도 있었지만, 우리는 아래아한글을 지켜냈습니다. 외국에서 만든 워드프로세서는 한글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으며, 아래아한글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한글 창제의 기본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죠. 언어는 그 나라 국민의 말과 소리를 포함한 문화이며, 그 나라 사람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기 나라 언어로 워드프로세서를 만든 나라는 몇 안 됩니다. 당시에는 컴퓨터 바이러스도 있었고, 안철수가 개발한 V3 백신이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이후 아래아한글은 국내에서 큰 인기를 끌며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었다. 외국의 소프트웨어 공세에도 불구하고, 한글을 지켜내려는 노력이 있었고, 그 결과 우리는 우리만의 워드프로세서를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나는 기술의 발전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처음 컴퓨터를 접했을 때의 그 작은 호기심이, 오늘날까지도 나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