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함께 해준 당신께 감사해요
얼마만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요즘에 간간히 집에서 도시락을 싸 들고 나오게 된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노란 알루미늄도시락(밴또)에 밥을 담고 유리병에 김치를 싸서 학교에 다녔다. 수시로 김칫국물 흘러서 가방이 다 젖고 어쩌다 맛있는 반찬을 싸가면 순식간에 없어져 버리는 젓가락 전쟁이 추억되기도 한다. 아주 특별한 날은 계란 프라이를 네모난 도시락 밥 위에 얹어가는 날이다. 그때 먹었던 계란 프라이는 요즘엔 느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별찬이었다. 옆에 친구와 반씩 나눠서 먹던 우정 어린 시절의 친구는 없지만 오늘도 도서관에 가는 나를 위해 아내가 계란프라이를 얹은 도시락을 준비해 놓고 나갔다. 보온밥통에 따뜻한 밥과 일식 3찬의 규정을 지켜 김치와 추석에 만들었던 전종류와 오징어채 볶음으로 담아놓았다.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번졌지만 도시락을 들고 집에서 나온다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도서관에 오면 탕비실이 준비되어 있어 냉온수와 전자레인지가 비치되어 있다. 작가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어서 서로 배려하는 마음으로 청결하게 사용되고 있다. 작가들 중 몇몇은 함께 점심을 나누며 즐거운 시간들을 보내기도 한다. 나는 사정상 거기에 합류하지 못했으나 그런 시간이 나에게도 기다려지는 마음이 있다. 한 젊은 작가는 커피전문가여서 손수 커피를 내려서 나누기도 했다. 나도 한 번인가 그 작가의 커피를 얻어 마신적이 있다. 오늘도 열린 문밖에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오늘도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나와서 창밖의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어제는 비가 내린 탓인지 하늘은 말고 공기도 시원하고 마음까지도 평화가 느껴진다.
월요일 아침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을 압박하는 시계 초침은 한동안 우울감이 있어 초침이 없는 시계로 바꾸어서 걸었더니 안도감이 생기는 듯했다. 시간은 그처럼 우리를 불안하게도 하고 서둘러 움직이게도 하는 마력을 지녔다. 초침 없는 시계가 가르치는 시간에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서 오늘 해야 할 일에 대해 준비하고 실행에 나선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아픈 허리에 온통 신경이 쓰이지만 시니어 일자리인 우리 술 교육관에 나왔다. 아직 아무도 나오지 않아서 내가 전자키 문을 열고 교육관에 들어선다. 우선 불을 켜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에어컨을 켜서 실내 온도를 덥지 않게 작동시킨다. 여기저기 주말에 사용하였던 도구들이 널려 있어서 모두 모아서 씻고 말려서 정리정돈까지 하고 나면 나만의 시간에 머물 수가 있다. 오전에는 주로 주변 환경정비와 혹시 오후에 있을 체험고객에 필요한 과정들을 필요에 따라 준비하는 일이 전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수행하고 시간이 되면 퇴근을 한다. 이후에 내가 가는 곳은 허리 치료를 위해 병원에 가는 것이다. “어서 오세요. 1번으로 가세요.”한다. 늘 반복적으로 이어지는 물리치료를 하려고 오는 환자들에게 물리치료사들의 일상적인 인사다. “네, 허리에 두 개요.”나도 매번 오면서 단답형으로 응대를 한다. 방금 전에 담당의사를 만나고 진료를 받았다. 언제나처럼 “좀 나아지셨죠?”라고 묻는다. “예, 조금요. 아프다가 안 아프다가 하니 지루하기만 합니다..” 담당의사는 내 얼굴도 안 쳐다보고 컴퓨터 화면에 집중하면서 “그러다가 낫는 거예요. 약 좋은 것으로 드릴게요. 꾸준히 나오세요.”한다. 그러고는 간호사에게 “◌◌◌◌맞게” 한다. 벌써 두 달이 지나고 있다. 아파서 병원에 다니는 나는 퇴행성 척추관 협착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더불어 확인시켜 주는 것은 척추전방위전위라 했다. 의사들마다 조금씩 다른 처방을 하기도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비수술적 치료를 원하기 때문에 길고 지루하고 힘든 과정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 나에게 도움이 되는 치료법을 이야기해 주지만 나의 고통은 같이 사는 아내도 몰라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오롯이 나만의 병이기 때문이다. 약 30분간의 온열 찜질이 끝나면 초음파치료와 전기치료를 이어서 하게 된다. 다음은 허리 견인을 하고 치료를 마무리한다. 치료를 받고 나면 잠시는 심리적인 치료가 되어서 인지 호전된 듯하다. 온열치료를 하는 시간은 심신을 쉬는 시간이다. 그때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야, 너 뭐 해” “ 응 나 도서관에 있어.”하고 둘러댔다. “너 허리 아픈 것은 어때, 치료 잘 받고 있어” 하면서 나를 걱정해 준 듯 묻는다.
이 친구는 초등학교 친구인데 가끔씩 남편과 속상하고 나서 전화할 때 없으면 전화한다고 했다. 나는 언제나 중립적인 입장에서 응대해 주고 때론 맞장구도 쳐 준다. “야, 있잖아. 그 사람 흉좀 봐야겠다.” 하면서 내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그래 추석이 다가오니 아이들 모두 모여서 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었어. 그때도 내가 돈을 냈다. 돈 가지고 어지간히 좀팽이 노릇을 한다. 그날 또 다른 장소에서 차 마시고 선물도 사주고 했어 그런데 있잖아 그 사람이 나더러 돈을 많이 썼으니 얼마를 분담해서 내놓으라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돈 없다고 했더니 자기가 사준 반지랑 목걸이 다시 내놓으라고 하더라. 얼마나 지질한지 창피해서 죽겠더라.” “이제 와서 이혼할 수도 없고”그랬다. 친구의 남편은 오랫동안 개인택시를 운전했다는 것은 안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부부였다. 하지만 내 친구는 정말 순종적이고 화낼 줄도 모르는 착한 여성이었다. 내가 이 친구를 잘 아는 이유는 친구이면서도 친척이기 때문이다. 나와 고조할아버지가 같은 큰 집 쪽 친척이다.
얼마 전에 외제차와 사고가 있어 금전적 부담도 크고 보험할증도 늘어나고 심리적인 위축감도 들어서 결국 개인택시 면허를 팔았다고 했다. 나이도 들고 하니 건강차원에서 적당할 때 운전을 안 하게 된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을 했다. “차를 팔고 미안했던지 나에게 금반지와 금 목걸이를 해 주더라. 이 사람이 웬일인지 의아해했지만 고맙더라.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내가 돈이 없다고 하니 자기가 얼마 전에 선물해줬던 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으라 하더라. 아이고 추접하더라. 그게 말이 되니.” 한껏 목청을 높이며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남편 흉을 보았다. 물리 치료실은 칸막이는 있지만 소음방지가 안되어 환자의 숨 쉬는 소리, 치료받는 소리가 다 들리는 환경에서 나는 그냥 “ 응. 응, 그래, 그렇구나.”라고만 말하고 듣기만 했다. 아마도 가까이 있는 환자는 알아들었을 것이다. 또 이어서 “야, 너에게 하소연하고 나니 속이 시원해진다. 나는 근로복지공단에 실업급여 신청하고 교육받으러 왔는데 아직 시간이 남아서 커피숍에 들어와서 너한테 전화했어”그랬다. 내 친구는 가끔 나에게 남편 흉을 보았다. 마땅하게 전화할 친구가 없다고 했다. 나는 친구의 남편도 잘 안다. 큰집에 애경사가 있을 때는 꼭 참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예기 안 듣고 만났을 때는 조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경상도 사람이었지만 정도 많고 유머도 있었다. 그런 친구에게 내가 한마디 거들었다. “야! 세상에 부부가 다 그런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거야. 별다를 것 없어. 조금씩 차이는 있겠으나 아웅다웅하면서 나쁠 때는 금방이라도 헤어지고 싶지만 자고 일어나면 그래도 해묵은 내 남편이고 마누라고 하는 것이야. 요즘 젊은 애들이야 다르기도 하지만은” 그 친구는 자기편을 들어주는 것보다는 남편 편을 들어주면 내 느낌으로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사는 게 뭐 별거 있더냐. 욕 안 먹고살면 되는 거지”. 우리가 일생을 살다 보면 부부가 백년해로해야 하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러 가지 현실에서 부딪히는 일들이 생기게 되고 어떨 때는 남보다 못한 원수가 되어 금방이라도 갈라설 듯이 이판사판 싸우는 경우도 흔히 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타고난 팔자라고 하는 노래도 있다. 그저 힘들고 어려울 때는 팔자려니 하고 한숨 돌리고 다시 시작해 보는 것이다. 아침에 마누라가 나를 위해 도시락을 쌀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싸 놓았을까? 아내가 말하지 않으면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니 나는 내 생각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맛있게 먹는 것이 보답일 것이다 생각했다. 도시락을 펼쳐 놓고 맛있게 먹고 보온병에 담아 온 작두콩차를 한잔 마시며 가을 하늘 흰구름사이로 우리 부부가 가장 좋았던 때를 회상해 본다. 스무 살 중반쯤에 객지에서 만나 마음에 이끌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 낳고 살아오면서 갖은 고난 함께 이겨냈으니 사랑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작고 큰 허물도 문제시되지 않았던 좋은 시절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이 들어 정 때문에 산다고 하는 부부도 결국 그 깊은 곳에서는 사랑보다 깊은 정이 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나이 들어 티격태격하며 살아오며 아이들 출가시키고 둘만 남은 집안에는 “아이고, 아야.” 소리만 남아있고 날마다 늘어가는 약봉지는 밥보다 더 많이 먹는 시절에 와 있으니 서글픈 생각도 가슴을 저미고 들어온다. 그래도 믿고 의지했던 부부이기에 세상 끝날까지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기 의지를 굳게 하여 서로에게 힘이 되는 시간으로 이어가기를 소망해 본다. 추석날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를 만나고 아버지 추모관에 다녀왔다. 내가 사랑하는 이 부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에서 아픔이 굳은살이 되어 이제는 아프지도 않은 시간에 놓이게 되었다. 자기 의지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면 꼴 보기 싫은 남편도, 밴댕이 소갈딱지 남편하나 잘 챙기지 못한 아내도 지금 마주 볼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살아있는 서로 섬기지 못한 부부에게 꺼지지 못한 불씨가 남아있다는 것을 또한 감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