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심을 느낄 때 감사하게 된다.
나는 가끔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혹시라도 진심을 들어내지 않을까 세심하게 노력을 하곤 한다. 오늘도 난 도서관 집필실에 나와서 시화전에 제출할 시를 두 편 써 놓고 한참 동안이나 갈등을 겪었다. 두 편의 시 중에서 한편을 고르려고 하니 마음이 딱 정해지지 않고 흔들거렸다. 하나는 “열정의 보편성”이라는 시이고 다른 하나는 “진심”이라는 시다. 두 편 모두 연민을 느끼게 하는 섬세한 마음을 표현한 시였다. 시에서 누군가를 지칭할 만한 대목이 있는데 누군가가 나에게 누구를 마음에 두고 쓴 시냐고 물으면 난감해 할 수 있는 시다. 평소에도 내가 표현은 글들 중에서 꼭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한 표현이 있어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럴 때는 나는 진심을 털어놓을 수가 없다. 어떤 해석의 말을 할지라도 갸우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냥 보편성에 기초를 두고 글을 써보곤 한다. 보편성은 어쩜 누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가끔은 오해를 받기도 한다. 나는 이곳 완산도서관에 와서 열정을 느끼며 사색하고 글쓰기를 하고 있다.
점점 관계하고 만나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사회가 변화하고 살아가는 방식이 달라져 가는 이맘때쯤에 무뎌지는 마음을 지탱할 여유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내가 지은 자식들도 품 안에 자식일 뿐 각자의 생활에 몰입하고 있기에 나 또한 거리를 두고 있다. 모임이 몇 개 있긴 하지만 친한 친구들과의 모임이 아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다. 한 달에 한번 모이는 모임이 하나 있고 격주로 만나는 식사모임이 있다. 그 외에 교회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교제하고 친교를 맺는 모임이 한두 개 있다. 특별히 운동하는 클럽에 가입을 안 하고 있어서 별다른 재미는 없다. 가끔은 건강을 위해서 혼자서 하는 실내 자전거 타기나 스트레칭 정도로 무료한 일상에 젖어있을 때가 있다. 내겐 그런 류의 모든 일들이 어쩜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한동안 캘리그래피에 몰두하여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심취해서 작품을 할 때가 있다. 때로는 마음깊이 즐거움에 자만을 하기도 했다. 누군가와 지속가능한 만남을 바라기도 했지만 서로에게 진심으로 대하는 것은 자칫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할 것 같은 두려움도 있다. 사람들은 관계의 지속을 위해서 때론 가식적이어야 하고 진심을 숨길 수도 있어야 한다고 한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에 공감을 한다고 해도 극히 진정성을 다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두고 계층을 형성하게 되며 서로에게 진심이 아닌 가식이 지배하는 관계를 하게 되기도 한다. 내가 내 마음을 털어놓을 때 상대가 “맞아요. 나도 그랬어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하는 공감은 내 마음에 현실과 조금 동떨어진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가 있다. 오늘 내가 두 편의 시를 써서 누군가에게 피드백을 요청했더니 역시나 진정성인 답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만 나에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었다. 가식적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오해는 없어야 하기에 나는 과감하게 적용할 수 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노트에 글을 쓴다. 오늘 하루 중에 해야 할 일과 기대되는 심리상태를 표현해 적어보기도 한다. 아침에 느껴지는 세상으로 향하는 나의 모습과 감정을 미리 정리해 볼 필요가 있기에 저녁에 쓰는 일기와 다른 형태의 글을 쓰게 된다. 일기는 하루를 보내면서 느끼는 일상과 감정들을 쓰는 것이지만 아침에 쓰는 글은 내가 허투루 살아가지 않기 위해 일정을 미리 들여다 보고 내가 어떻게 관계해 나갈 것인지를 정리해 보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글을 쓴다는 것은 문밖으로 나가는 나를 지혜와 선견으로 무장하여 어렵고 힘든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함이기도 하다. 나는 신문을 거의 읽지 않는다. 뉴스도 관심 있게 시청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 살아가는 소리를 듣고 그들의 호흡소리를 듣는다. 세상에 모든 사람들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구의 이야기를 듣고 옳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고쳐서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점점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무섭고 악랄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은 느낌은 당연시 해야겠지만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운명적인 접근을 두려워하게 된다. 아침에는 클래식 음악을 듣고 낮에는 발라드를 듣고 저녁에는 트로트를 들어야 하는 규칙은 없다. 모두가 자기가 살아가는 방식을 정당화하고 운명처럼 다가오는 사건들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한다. 아침에 생각했던 일들이 저녁에는 평가를 하게 되며 그 결과에 따라 잠자리의 평화는 달라질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운세를 먼저 보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것은 우연을 핑계로 한 허무한 일상일 것이다. 오늘도 뜨거운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누군가를 만나 그 사람과 진정성 어린 대화를 나눌 때도 모두가 다 진심은 아닐 것이라는 의심을 먼저 하게 된다. 이처럼 사람이 서로 만나 사랑도 하고 남모르는 거래도 하고 서로에게 진심이 아닌 가식을 섞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일상에서 가끔 일어나는 일에서 요즘 나는 무덤덤하게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의 이런 행동양식은 나의 진심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일이다.
오늘도 도로 위를 굴러가는 수많은 자동차들 안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디를 가고 있을까? 이런 생각이 나에게는 무의미한 일 일 것이다. 수많은 일터에서 보람을 찾고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과 고통 속에서 목적에 다가가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것도 어쩜 네게는 무의미할 것이다. 하는 일 없이 공원벤치에 들어 누워있는 사람이나 장기나 바둑판을 들여다보면 묘수를 머릿속으로 그리는 사람들이나 사랑에 빠져 진심을 다하는 척하는 사람들도 나에게는 무의미한 일이 되었다. 오후 한적한 날 외간남자와의 밀회를 즐기는 여인이나 탐욕스러운 남자의 홀림에 빠져든 여인이나 나에게는 무의미한 일이다. 행실이 단정치 못하다고 비난을 받는 사람이나 부모에게 패륜적인 사람이나 어쨌든 사람 사는 세상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들은 나는 진심이 아니라 믿기에 무의미한 일이다.
도서관 2층에서 시력이 나쁜 듯 안경을 쓰고 글자에 몰입되어 있는 사람들도 시장 모퉁이에서 박스를 깔고 감자와 과일을 파는 행상도 그들만의 삶에서 나는 그들에게 무의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세상의 수많은 일들 중에서 의미를 두고자 하는 일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일에 국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쓰고 독서를 하며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나를 위해 사용하려고 한다. 나는 누구에게도 간섭받고 살아가는 것을 피하고 싶다. 진심을 알게 해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나의 모든 것을 투자하게 될 것이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양한 관계와 가식적인 만남이기에 진정성을 찾지 못해 의심하고 오해하는 일들이 만연해 있다. 그대의 진심은 그대만 알 뿐이고 내게 비친 진심은 가식이 섞여 있기에 서로 사랑하고 있어도 온전하지 않다는 논리에 빠져 스스로를 갉아먹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줄도 모른다. 어쩜 그 진심이 진짜 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은 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너는 나를 믿느냐고 물을 때 “그렇다 나는 네가 어떤 경우라도 너의 진심을 믿는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진심
함께 할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지
한줄기로 모아 달려드는 바람에도
너만을 생각하면 살아갈 수가 있지
너 아름다운 잔에
사랑을 따를까, 정을 따를까
은연한 밤 못다 이룬 잠
손끝으로 전해지는 너의 진심을 알리
그리운 맘 달빛에 벗하여
백지위에 꽃을 피우고 바람이 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