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과 배려로 살아가는 세상
마음 하나 챙겨서 떠나온 인생 여정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을 것 같은 도랑 하나를 만났다. 쉽게 건너면 되겠다는 생각에 도랑을 개념치 않았다.
산란기를 맞은 커다란 잉어 한 마리가 나를 보았는지 몸부림치며 물길을 거슬러 올라간다. 잠시 앉아볼까 하다가 애기똥풀이 노랗게 물들일까 봐서 그냥 앉지도 못하고 풀밭에 서서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하얀 쇠백로 한 마리가 가만히 서있는 모습이 발밑에 지나가는 물고기를 기다린 듯 바닥을 주시하고 있다.
바람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새로운 공기를 밀어다 놓고 지나가 버린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참 알 수가 없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나 어떻게 지나가야 하는 줄 도통 알 수가 없으니 때론 바람 불어 물결치는 마음을 잔잔하게 할 수도 없다.
잔잔한 물 위에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인지 물결을 만들어 놓고 달아나는 바람은 어디로 가는 줄 알 수가 없다.
내가 살아온 날 중에 바람이 불지 않은 날이 며칠이나 있었을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오늘 내게 전해줄 기쁜 소식을 기다리며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창밖을 본다. 아침에 창에 비치는 밝음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새로움이었다.
우리가 함께 현장 답사를 하고 이론을 공부하며 기관에서 이끄는 대로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왔기에 시험에 대해 많은 준비를 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을 충분히 습득하는 것은 주관적 관점이 작용할 수 있기에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단체에서 목적하는 방향이 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역사는 관점이 다르고 관점에 따라 인식되는 바가 다를 수 있기에 충분히 공감하고 짧은 시간에 전문가 수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시험은 언제나 공정하고 공평한 기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왠지 분위기가 신선한 바람 같지가 않았다.
결과를 받아 든 나는 황당함을 넘어 따라왔던 시간이 부끄러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세상의 어떤 것과는 분명 달라야 한다는 것을 학습하는 내내 마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공정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기관은 공개했던 내용을 지키지 않았다. 시험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술이나 방법에 대해 공개하지도 않고 두리뭉실하게 넘어갔다. 이러한 행태는 사회 곳곳에 심심찮게 행해지는 불공정 행위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관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빽 없고 정보도 없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들러리를 세우는 일이 비일비재한 세상이기에 놀랄 일도 아니다. 이 기관도 역시나였다.
며칠전 선종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소개된 어록에서 "함께 연대하며 살기위해 애써야 합니다."라는 말씀을 듣고서 우리사회에 만연한 기득권층의 이기적인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고서 결과는 실망을 안겨 주었다. 과연 이 기관에서는 정의로운 기회 제공의 가치를 소중하게 지켜가는 역사적 책임을 다하고 있는 것 인가 반문하고 싶다.
그들은 서슴없이 역사적 사건이기에 이해하는데 상당히 어렵다고 하면서 짧은 시간에 전부를 결정하고 마는 행태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 고질적인 기울임이 작용한 불공정 행태인 것으로 비친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약자를 평가하고 자기들 뜻에 맞는 자를 선별하여 결정하는 것은 기득권을 마음대로 사용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줌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람답게 사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지배층의 가혹한 탐학에 맞서 목숨 바쳐 싸웠다는 민중의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그들도 민중이 원하지 않은 자기들만의 리그를 거리낌 없이 하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에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다.
바람은 언제나 새롭게 불어오지만 오래전 역사 속 시린바람이 섞여 있는 듯하여 씁쓸한 마음이 든다.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태연하게 둘러대던 역사의 선인들이 사고가 새 시대를 살아가는 민주 시민의 사회 전반에 아직까지 너무 깊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구든지 신분 상승을 꿈꾸는 것은 일생을 살면서 간절한 바람이고 소원인 것이다. 차별받고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신분이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를 쌓고 명예를 높이어 권세를 누리는 것은 세상 모두에게 최고의 목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분을 상승하기 위해서는 세 번의 기회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부잣집 권세가에서 태어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자기가 죽도록 노력해서 지배층에 들어가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자식이 성공해서 가능할 수 있다고 했다.
모두가 허사로 돌아가면 결국 가붕개가 되어 쓸쓸히 그늘 속에 슬픔을 안고 무심한 바람 따라 흔들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조금 못났다고, 조금 어리숙하다고 차별하고 소외당하게 한다면 이 기관에서 실현하려는 역사의 가치는 가식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이곳에서만은 이런 행태를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역사를 부정하고 숭고한 희생의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기에 더욱 신중해야 할 것이다. 남을 비판하고 평가하기는 즐겨하면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는 리더들은 당위성을 얻기 위해 스스로를 더 깊이 헤아려 보아야 할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꿈꾸는 이유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받고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누리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일괄적이 아닌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으로 쌓아가는 섬김이 필요한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 싶다.
내가 살았던 시골은 바람이 참 많이 부는 섬마을이었다. 그래서 집집마다 돌로 담을 쌓아서 비바람을 막아야 했다. 그 돌들은 하나도 똑같은 것이 없었다. 둥근돌, 기다랗고 울퉁불퉁한 돌, 작은 돌, 그중에 네모난 돌도 있다. 푸석푸석한 돌, 단단한 돌, 매끄런 돌도 있다. 이런 돌들로 바람을 막는 담장을 쌓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은 이 집의 주인이다. 돌 하나도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틈새를 메꾸며 담의 역할을 감당하게 잘 배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지식과 기술이 없었어도 어떤 강풍에도 거뜬히 견디는 튼튼한 돌담을 쌓았던 것이다. 이 돌담은 서로 다름을 닮은 인간미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약간은 모자란 듯 자연스러움이 있어서 정겹게 느껴지곤 했다.
요즘에는 정형화된 벽돌과 거푸집으로 반듯하게 쌓아서 비바람을 막고 이웃의 시선도 막는 담을 만든다. 요즘 집주인은 남의 손을 빌리니 참 쉽다. 돌을 주우러 여기저기 다니지 않아도 된다. 단번에 시멘트를 부어서 튼튼하고 높은 담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좀 더 불편하게 삽시다.”라고 말씀하시던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분 계셨다. 그분은 분명 자기가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한 철학과 명분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고 그분이 곁에 안 계신 지금도 그분을 그리워하고 있다. 불편하지만 참고 살아가자는 그 가치를 최고로 인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질하기를 참 쉽게 한다. 우리 역사에서도 보듯이 개인의 영광과 부를 위해서는 인간의 도리마저도 과감히 버릴 줄 알았다. 신의와 정도를 지키고 사람의 마음(人心)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일지라도 개의치 않았다.
어느 순간에 형편이 좋아지면 고난 속에서 절망하던 시절을 일부러 잊고 달콤한 꿀맛에 영혼을 팔아버리는 비양심 인사들을 흔히 볼 수 있음은 통탄할 일이다.
인류 역사에서는 사회가 어지럽고 정치가 실종되었을 때 우리에게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는 참 스승이 계셨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주고 꿇었던 무릎도 세울 수 있게 가르쳐 주셨다. 누구를 짓밟고 일어서는 것이 아닌 서로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고 함께 일어설 수 있는 도움을 선의로 베풀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는 회초리를 든 참 스승이 없다. 도리를 몸소 행하시던 큰 어른도 없다. 분명 지금에는 지도층에 계신 분들이 일신의 안위만을 지키는 어수선하고 혼동의 시간을 묵묵히 보내고 있다. 모든 가치는 신념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신념은 없는 듯하다. 모두가 기회주의자가 된듯하고 이기주의로 꽉 차있는 듯하다. “나만 아니면 되지.” “나 건드리지 마!”하며 담을 쌓는 이웃들이 너무 많아졌다. 세간에 “남이야 죽든 말든 나만 괜찮으면 돼.”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나는 언젠가 삼공에 대해 배웠다. 바로 중국사의 삼국지에 나오는 지략가 제갈량의 삼공이다. <공평>, <공정>, <공개>의 원칙으로 정직한 양심일 것이다. 나는 직장에 다닐 때 삼공의 가치를 소중한 양식으로 삼고 지켜가려고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는 무력으로 싸우는 장수는 아니었지만 지략에서는 장수를 능가하는 인물이다. 제갈량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재 등장하는 이유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삼공은 반드시 지켜져야 할 소중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특히 리더들이 삼공을 지도력으로 갖추려고 하지만 실천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일일 것이다. 특히 정보공개는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고 공정하게 제공되어야 할 소중한 가치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부터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사회 전반에 걸쳐 제발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오늘도 하늘은 맑았다. 흐린 날이 있으면 맑은 날도 있겠지...
물가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가느다란 다리로 서서 최대한 자기를 숨기고 무심코 달려드는 물고기를 잽싸게 낚아채는 큰 왜가리의 생존비법에서 사람들의 세상사와 별다를 것이 없다.
물빛이 눈이 부시게 쏟아지는 강가에서 작은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을 바라보며 주변의 위협까지 감지하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철새들의 삶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훨씬 사냥하기에 유리했을 것이다.
분명 바람이 어려움을 만들어 주었지만 탓하지 않았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람은 분명 지금 불고 있는데 오래전에 불었던 바람처럼 느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새로운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변화와 혁신의 바람을 말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득권층은 자기의 것을 조금도 나누지 않으면서 남의 것을 빼앗아 자기 몫을 떼고 나누어주는 원망 섞인 관행을 답습하고 있다.
세상은 언제나처럼 정해진 질서를 조금씩 지키지 않아도 별일이 없었기에 그렇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이 정답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선의의 경쟁을 통해 우열을 가리고 더 좋은 인재를 고르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바람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어디에서 시작되어 불어오는 것 일까?
누군가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라고 했다고 한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면서 바람인 줄 안다.
바람은 혁신이다. 누군가에게는 그 바람이 좋은 바람인 줄, 싫은 바람인 줄도 안다.
오늘도 바람은 어디에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지만 맑은 공기를 가져다주는 바람이다. 내일도 더욱 신선한 공기를 이동시켜주는 바람이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바라는 바람도 어쩌면 물결을 만드는 바람이기를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