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숭이 임금님
날씨를 핑계 대는 개운치 않은 아침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냥 그랬다. 오늘은 무엇을 하며 살아가지? 누구를 만나고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나는 알아듣지 않을 정도로 중얼거렸다.
“인생 뭐 있어?”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면 되지
대범한 척 마음은 먹지만 작은 일에도 내 맘에 들지 않는다고 화를 내고 복잡하게 생각하게 되는지 나도 알 수 없다.
그렇게 길지도 않고 그렇다고 손뼘 재듯 짧지도 않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소한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어쩜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스스로 행복할 줄 모르는 어리석음을 따라 살고 있다.
인생살이가 어찌 영원한 불행만 있고 영원한 행복만 있을 수 있겠는가?
순간순간 찾아오는 행복도, 불행도 바람이 불고 가는 것 같을진대 누구라고 행복만을 누리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건강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가 없을까?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인생살이가 덧없다”라고 누군가 그랬다.
어쩜 인생살이에 하루하루를 일희일비할 수 있겠냐 마는 오늘같이 흐린 날은
왠지 불길한 예감이 먼저 달겨 들기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게 된다.
까닭 없이 우울해지거나 마음이 흐트러져 불안한 마음이 들게 된다면 괜한 일에 짜증을 내기도 하고 심술이 발동하기도 한다.
어느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일에는 마음먹기 달렸다.”라고 한다.
마음이란 것이 어찌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줄까마는 그렇다고 전혀 손쓸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오늘따라 어수선한 마음을 달래 보려고 건지산 편백나무 숲길에 들어선다.
귀에 새까만 털을 곤두세운 청설모가 잽싸게 나무 위를 오른다. 먹을 것이라도 물었나 본다.
숲 속에 들어서니 풀냄새가 짙게 묻어난다. 비가 온 뒤라 그런지 습한 기운이 온몸과 마음을 축축하게 감싸 온다.
촉촉한 황톳길에 맨발 걷기 하는 사람들이 오르락 내리락 체인처럼 이어져 걷고 있다.
검은 등 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비가 보슬보슬 내릴 때 이 새의 울음소리가 “홀딱 벗고”처럼 들려서 홀딱 벗고 새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검은 등 뻐꾸기가 울면 여름이 다 왔다는 소식이라고 했다.
언젠가부터 텃새가 되어버린 직박구리는 그 날개짓이 산만하고 부산스럽다.
꽃들은 피었다 지고 나뭇잎들이 초록빛으로 숲 풀냄새를 뿜어내고 있다.
건지산 숲길은 지금이 최고의 휴식과 힐링의 시간이다.
하늘 높이 솟아 그늘을 만들어 주는 편백나무는 늘 늠름하게 기운을 전해주고 있다. 가끔씩 스치게 되는 때죽나무는 하얀 은종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며 은은한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
꾹꾸우꾹구, 꾹꾸우꾹구 산속을 울리는 숫비둘기 목쉰 구애소리는 멀리까지 번져간다.
모두 다 평화롭지는 않지만 나는 숲길을 걸으며 나름 평안을 찾는다.
나에게는 이렇게 좋은 날은 별로 많지가 않았다.
울적하고 정돈되지 않은 마음으로 나선 산책길에서 나는 마음을 차곡차곡 챙기며 평화로움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고 겨드랑이는 축축해졌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인지 습하고 더운 기온이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쉴 곳을 찾아보다가 숲 속 작은 도서관이 생각이 났다. 그곳에 가면 쉴 수 있는 의자가 있고 책 냄새가 있어서 잠시 휴식의 장소로 최적일 것 같았다.
도서관 입구에서 신발을 벋고 들어서니 아직 이른 시간이라 불이 켜진 숲 속 작은 도서관에는 관리인 인듯한 중년 여성 한분만이 자리에서 나를 보더니 “어서 오세요”라고 가벼운 인사를 했다.
도서관 안은 통창으로 숲을 담은 액자처럼 예술적 풍경을 먼저 보게 해 주었다. 약 20여 석의 자리에는 숲 속 향기와 평화로움이 먼저와 자리하고 있었다.
나도 “안녕하세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가운데 테이블 아래에서 의자 하나를 당겨서 앉았다.
우선 호흡을 고르고 앉아서 먼저 펼쳐보는 것은 핸드폰이었다. 여기저기에서 온 카톡 아침 인사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하나씩 확인해 보고 답글을 보냈다.
다행히도 이곳에서는 와이파이가 작동되어 빠르게 전송이 되었다.
자리에 앉아 인증샷도 찍고 여유를 찾아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언 듯 눈길을 끄는 책이 한 권 있었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라는 어느 스님의 에세이 책이었다.
“일상에 지친 당신에게 괴짜 스님이 전하는 재미있는 휴식”이라는 타이틀 롤을 먼저 소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집착하고 쉽게 화를 내며 살고 있지만 그러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칠 수도 있다”고하며 “짜증을 내어서 무엇하나.”라고 전해주었다.
그는 매일 경전을 읽고 수련을 하며 종교인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세상살이에서 겪은 사소한 일들에 대해 편하게 써놓은 이야기들이었다.
누구나 인생을 살다 보면 별거 아닌 일로 짜증을 내고 남의 마음까지 상하게 하는 해코지를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혼자서 스스로 삭이며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없는 일일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늘 갈등과 혼란을 겪으면서 괜한 짜증도 부리고 별일 아닌데도 성화를 내기도 한다. 이런 과정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이고 그렇게 함으로 더욱 끈끈한 인간미 갖게 되는 것이다.
한참 동안 책을 읽다가 통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마음을 동여매고 밖으로 나왔다. 혹시 비가 오려나 해서 들고 왔던 우산을 챙겨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늘 걷기 목표인 1만보 걷기에 도전하고 있기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점점 산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반려견을 목줄 하여 산책 나온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요즘에는 없어지고 있는 전천후 등산복 차림의 노인분들이 많이 있다. 일명 똥 싼 바지라고 하는 헐렁한 바지를 입은 초라해 보이는 분들도 가끔씩 보인다.
몸이 아파서, 마음이 아파서 치유 걷기를 하는 분들도 있다.
“사람 사는 게 별거 있더냐?” 했듯이 지금 이 순간이 어쨌든 가장 좋은 날임에는 틀림없다.
그저 남한테 욕 안 먹고 소소하지만 자기만의 즐거움이 있다면 그날은 분명 좋은 날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좋은 날에” 이 길을 걷고 있음에 감사하게 된다.
가끔은 창 넓은 산장 로비에서 값비싼 와인잔을 들고 가볍게 핸들링하며 향미를 느끼며 미묘한 분위기로 째를 내어보는 내가 되어 보기도 한다.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틀어 놓고 멀리서 다가오는 구름 타고 오는 여인을 맞이하는 최대한의 예의 바른 젠틀맨이 되어 보기도 한다.
온 세상을 귀족이 되어 폼나고 멋지게 살아가는 꿈을 꾸는 나는 오늘 아침에 꾸질했던 마음을 모두 숲 속 그늘진 곳에 던져 버리고 왔다.
가볍게 미소를 띠며 하얗게 다가오는 부드러운 손길을 잡으며 행복의 나래를 펴는 이 순간이 현실을 떠나서도 누릴 수 있는 나만의 행복일 것이다.
잠시 꿈을 꾸었다고 해도 좋다. 나는 마치 군주가 되어 수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숲 속에 평화를 가꾸고 있다. 최고의 순간에 살아가고 있음을 어쩌면 벌거숭이 임금처럼 나만의 만족으로 행복의 세레나데를 부르고 있다.
무엇이든 못할 것이 없으니 나는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는 가장 좋은 날이다.
이제부터 나는 배척당하고 차별당하는 쓸쓸한 노인이 아니다. 숲길을 걸어도 나는 누구보다 당당하고 자존감이 충만하다. 살며 생각하며 느끼며 글을 쓰고 있노라면 가끔씩 소외되고 배제된 느낌을 지울 수 있다.
무엇이 인생살이에서 중요한지,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오고 가는지.
덧없는 인생살이가 괜한 짜증을 부린다고 치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짜증을 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어찌 늘 좋은 생각으로만 살 수 있겠는가?
오늘 내게 주어진 하루를 내가 어떤 생각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좋은 날이 될 수도 있고 우울한 날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오늘도 벌거숭이 임금님이 입었던 멋진 옷을 입고 의기양양하게 사람들 앞을 지나가고 있다. 혹은 웃음거리가 될지 모르지만 이날은 나에게 최고의 날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