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인공 두남의 캐릭터
우리에게 70년대 영화나 소설 속 아버지의 전형 중 하나는 막노동을 하며 술주정뱅이에 도박을 일삼으며 술취하면 어머니를 괴롭히던 망나니였습니다. 관심과 재미를 높여야 하는 내러티브의 특성으로 아버지의 전형을 가부장적이며, 능력없는 사람으로 표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평범하고 재미없는 보통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말입니다. 관심과 자극을 위한 내러티브는 결국 우리들의 아버지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고 가장 작은 공동체 단위인 가족의 연대감을 약화시켜 왔습니다.
아버지는 일당으로 받은 돈을 불리기 위해 노름에 빠집니다. 돈을 따면 아내나 자식에게 큰 소리 한 번 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말입니다. 그러다 일당도 잃고, 빚도 집니다.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마신 술은 가족에게 술주정을 하는 원인이 되고, 결국 아버지 본연의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물론 몇 안되는 이들이었습니다. 변명을 붙이자면 미래가 없고 불안했던 당시 아버지의 나약한 희망의 한 모습이 도박과 술이었다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시절 남자들의 평균 수명은 지금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과로사, 사고사 등이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희망이 없던 시기, 그들은 가해자였지만 피해자이기도 했습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였지만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힘든 노동과 낮은 수입에도 최선을 다해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가족애가 깊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그랬듯 말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내러티브 속에서 무능력하고, 나약하며, 자식과의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로 묘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러티브 속에서 자식들이 아버지보다 엘리트들을 더 사랑하고 존경하는 세상으로 변해왔습니다. 산업화를 지나 탈산업화가 진행되는 지금까지 말입니다.
조선의 문신이자 양명학자 겸 서예가이며, 현대 한국학의 시조인 이광사의 딸에 대한 사랑은 현재의 딸 바보를 능가합니다. 그는 유배 기간 내내 딸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남존여비의 조선 시대에도 말입니다. 조선의 유교 사상을 바탕에 두고 들어온 이야기들로 그의 딸 사랑은 특별해 보입니다. 그러나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인류의 오랜 특성이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의 행동이 특별할 것 없는 일반적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편지를 한 번 읽어볼까요.
"늘그막에 막내딸을 얻으니, 사랑스럽고 그리움이 이상할 게 없다네 / 딸 아이 목소리 어찌 그리 맑고, 용모와 맵시 어찌 이리도 고운가 / 성질은 어찌 그리 슬기로우며, 재주마저 어찌 그리 많은지 / 지나는 사람 모두 한 번씩 안아주니, 아비로서는 당연히 더욱 사랑스럽네..."
그의 글에는 딸에 대한 무한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조선 시대 유학자이니 딸에 대한 사랑이 특별히 남달랐던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우리에게 조선의 남존여비의 내러티브가 전해지는 동안 딸에 대한 아버지의 근원적인 사랑이 왜곡되어 전달되었을 뿐입니다. 이광사 이전에도 딸에 대한 사랑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의 산물이었습니다. 작은 공동체 가족을 끌고갈 원동력 말입니다.
주인공 두남은 80년대 아버지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능하고 나약한 존재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아버지이며, 내 가족이 중요하니 남의 가족도 중요하다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가족에 대한 이타적인 마음은 타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가족이 중요하다는 이기심이 타인에 대한 이타심으로 발현되는 것을 보여줄 인물입니다. 그의 행동은 엘리트가 아닌 다수 서민 대중의 삶의 방식, 인류의 누적된 경험과 지혜의 형태로 네러티브 속에 자리할 것입니다.
주인공 두남은 이념과 규범이 아니더라도 생존을 위한 누적된 협력의 경험만으로 세상을 살 수 있음을 보여주는 소시민입니다. 권력자와 엘리트들의 영향으로 세상과 삶에 대한 오해를 거치지만 결국 거칠고 힘든 세상을 살아내기 위해서 서로 돕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우리들과 같은 보통의 사람 말입니다. 각자도생의 목소리가 커지는 세상에서 그는 서로 도움의 가치를 선명하게 보여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