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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가 도망갔다

by 바람꽃

결국 우리 아파트 전기도 도망갔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무더운 여름철 ‘아파트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는 소식을 뉴스에서나 봤었는데 결국 우리 아파트에서도 같은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퇴근 후, 우리 집은 여전히 살인적인 더위를 선풍기와 자연 바람에만 의지한 채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악기 연습을 하고 있는데 오후 6시 반쯤 갑자기 ‘펑’하고 큰소리가 들리더니 모든 전기가 꺼졌다. 우리 집만 전기가 나갔나 싶어 현관에 나가보니 엘리베이터는 ‘점검’으로 표시되어 있었고 옆집 전기 계량기도 멈춰 있었다.

창밖은 뭔가 터지는 소리에 놀라 급하게 나온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전기가 모두 나갔다'고 통화하기도 하고 서로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오늘은 남편이 회식이어서 저녁 식사도 간단하게 해결하고 딱히 해야 할 일은 없었다. 퇴근하자마자 세탁기를 돌렸더니 어느새 금방 끝나 있어서 점점 사라져가는 석양에 의지해 빨래를 널고 개고 서둘러서 잡일을 처리하고 창가에 앉아 후덥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가쁜 숨을 달래고 있었다.

‘양초라도 사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들려오 매미 소리는 ‘날도 더운데 고생한다’며 약 올리듯 유난히 더 시끄럽게 울어댔다. 창고를 뒤져보니 ‘캠핑용 랜턴’이 있어서 밤을 지켜줄 불빛은 충분할 것 같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습기 많은 축축한 바람이 불었는데 오늘은 집의 온도가 28도로 떨어질 만큼 날도 선선하고 생명수 같은 상쾌한 바람이 이따금씩 불어와서 어느 정도 참을만했다.

전기가 도망을 가고 나니 역시 안 되는 가전 제품들이 대부분이었고 의외로 되는 것들도 있었다. 냉장고는 문을 자주 열면 음식물이 상하므로 그대로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정수기는 그나마 물이라도 나오니 마실 수 있었고 화장실 변기도 수동으로 작동이 가능했다. 다만, 원래 한여름에도 따스한 물로 샤워를 하는데 보일러가 안되니 할 수 없이 온몸을 덜덜 떨어가며 차가운 물에 샤워를 했다.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드는 냉수마찰로 전혀 생각지도 못한 '혹서기 극기훈련'이 따로 없었다.


다른 집들도 전기 제품이 하나라도 더 늘면 늘었지 줄어들리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전기조차도 몸살을 앓고 있었겠구나’ 싶었다. 전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는다.

‘나만 아니면 돼’가 아니라 어차피 고장나면 서로 힘든 상황이 되니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한여름에는 에너지 절약에 더 동참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파트 상가는 멀쩡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그곳은 한전에서 전기가 온다고 한다.

주변은 평상시 처럼 아무일 없이 잘도 돌아가는데 우리 아파트만 암흑 속이라 이런 경험이 생소하기도 하고 쇼킹하기도 해서 남편에게 SOS를 쳤다. '대충 먹고 빨리 오라고'.

어둠이 짙어질수록 사방이 고요한 깜깜한 집 안에 막상 혼자 있으려니 조금 무서웠다.

남편은 계속 묵묵부답이고 딱히 피신할 곳도 없어서 집에 가만히 앉아 하릴없이 불이 켜지길 기다리느니 차라리 바깥 바람이라도 쐬며 ‘걷기 운동’이라도 할 겸 부채 하나 달랑 들고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산책로도 혼자 걷는 밤길은 역시 재미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3층인데 고층이 아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 더위에 고층까지 땀 뻘뻘 흘리며 걸어가다 보면 욕이 저절로 나올 것 같았다. 이웃들도 차 안에서 더위를 식히거나 밖에서 계속 서성이기도 했다.


집에 들어와 냥이를 붙잡고 바깥으로 부터 스며들어오는 불빛에 기대어 창가에 바짝 붙어 앉아 있으니 더위도 무서움도 참을만 했다. 조금씩 피곤함밀려오고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조금이나마 시원하게 느껴지는 베란다 바닥에 누워 조용히 잠을 청하는것!.

남편도 어느새 들어와 술에 잔뜩 취한 채 코를 골며 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저녁 11시가 되자 마치 '깜짝 이벤트'가 끝났음을 자연스럽게 알리는듯 드디어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그래도 집 나간 자식이 들어온 것처럼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다른 어느 때보다 더 긴 시간이 흐른 것 같은 소란스러운 밤이 지나며 그렇게 꾸벅꾸벅 불편한 하루도 조용히 저물었다.

한밤중에도 바짝 긴장된 마음으로 땀 뻘뻘 흘리시며 고생하셨을 분들께 조용히 감사의 마음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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