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컴퓨터 학원
만 나이로 서른두 살. 91년 12월생.
회사 생활 적당히 해 보았고,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하지만 세상은 내게 청년의 끝자락이라고 한다.
결혼, 이사, 이직 같이 굵직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몇 차례 깊은 고민을 해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까지야 그럴만했다고 치더라도 매번 지역에 상황에 휘둘리며 일하다가는, 이대로라면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다가는 당황스럽게 노년을 맞닥뜨릴 것만 같아서 큰 마음을 먹고 퇴사를 저질렀다.
얌전히 출퇴근을 했다면 한동안 안정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테지만, 자유경쟁시장에 뛰어들어 소망하던 것들을 마음껏 펼쳐보고자 하는 열정이 마음 안에서 일렁였고 나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어쩌면 지금이 무언가 크게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타이밍이지 않을까 조급하기도 했던 것 같다.
퇴사 이후로 몇 개월간 내 딴에는 무언가 열심히 해내기도 했던 것 같은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낡은 컴퓨터에는 갓 어른이 되었을 때부터 지겹도록 보았던 한글 프로그램이 켜져 있다.
결국 내실이 부족했던 탓에 남들 다 한 발씩 오르는 지금에서야 또 기본기를 닦으러 이곳에 와야 했던 건가.
몇 개월 전부터 진행 중이던 청년지원사업을 통해 구직자 신분을 활용하여 컴퓨터 훈련 과정을 듣기로 하였다. 제 의지로 일을 그만두었는데, 나라에서는 별의별 지원해 준다. 나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청년 : 만 19세 ~ 만 34세 ( 91년생까지 )
지원사업 설명란에 큼직하게 명확하게 토막 내어 청년을 정의하고 있었다.
만 나이로 바뀌게 되면서 청춘을 2년이나 벌었다고 낄낄대며 좋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나의 청년의 날은 몇 개월 뒤에 종료된다. 2월인데, 벌써 끝자락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서 일을 하던 당시에도 그렇게 OA(사무처리의 자동화)에 자신이 있진 않았다. 오랜 시간 공들여 쌓은 나의 소중한 문서 작업 능력은 요즘같이 AI나 챗GPT 같은 엄청난 기술들이 넘치는 세상에서 꺼내보면 그저 우리 아빠의 독수리타법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카테고리에 속할 것이다.
그래서 이참에 컴퓨터를 제대로 다시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원 위치도 남편의 회사 바로 근처에 있고 남편 출근시간과 수업 시작시간이 딱 좋게 붙어있어서 쫄래쫄래 왔다 갔다만 하면 되겠다 싶어서 수강을 신청했건만.
백수들에게 찾아오는 게을러서 오는 우울감에 휩싸였던 며칠 때문에 수업 첫날부터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쓴 모습으로 교실에 입장했다.
반 안에는 사십 대 몇 명, 오육십 대가 대다수였고, 호호 할아버지 두 분도 앉아 계셨다.
낡고 칙칙한 컴퓨터 학원에서 나이 지긋한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괜히 왔나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한번 빨아 마셨다.
뽀글뽀글.
긴 머리가 뽀글뽀글한. 한 성격 하겠다 싶은 아주머니가 교단 앞에 서서 매서운 눈으로 학생(?)들을 쭉 둘러보았다.
'아. 선생님이시구나. 아니 아니 강사님이시구나.'
"원래 기본실무와 자격증 두 가지를 같이 배우는 150시간 반만 있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자격증만 공부하는 자격증반으로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개강하게 되었어요.
제 이름은 김복순입니다. (뽀글뽀글 복순.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제가 예전에 오십오 세 반을 진행할 때 너무 고생을 해서 어르신들 다시 맡고 싶지 않았는데, 역시나 어르신들이 많이 계시네요.
학원이 전보다 많이 작아졌어요. 전에는 반도 많고 엄청 컸는데 지금은 규모가 많이 줄었고, 얼마 전에 학원장님이 새로 오시면서 저도 나이가 있어서 그만둘까 하다가 딱 한 가지만 약속받고 계속 남게 되었어요.
복사를 실컷 하게 해 줄 것. 용지 많이 쓴다고 나무라지 말 것.
어딜 가도 저처럼 꼼꼼하게 가르치는 사람 없을 겁니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셔야 하잖아요.
돈을 좇았으면 부자가 되었을 텐데 어휴.."
중저음의 옹골찬 목소리로 아슬아슬한 말을 계속해서 하는 뽀글 아 아니 복순 강사님 말을 듣다 듣다 슬쩍 눈알을 굴려 어르신들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는데, 아무 미동도 없으셔서 후- 한숨이 새어 나왔다.
수업의 첫날. 마우스와 키보드 그림에 설명이 달린 커다란 A3용지, 한글 프로그램 화면사진 곳곳에 1,2,3.. 번호가 달려서 "화면, 메뉴" 등의 사소한 설명이 가득 적힌 유인물 다발을 나누어 받았다.
'자 이게 클릭이야..'
머릿속에서 예능 속 한 장면이 떠오르며, 강사님이 "클릭하세요."라고 말하면 클릭. "두 번 클릭하세요."라고 말하면 두 번 클릭.
그마저 따라오지 못하는 어르신들을 위해 수업이 잠시 중단되기 일쑤인 이 교육의 현장에서 나는 웃음과 한숨이 동시에 나오는 감정을 느꼈다. 물론 두 가지 모두 절대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러면 왠지 크게 혼날 것만 같아서.)
"ITQ 자격증을 보고 누군가는 그거 거저 얻는 거야, 그거 그냥 나눠주는 거야 하며 무시합니다. 특히 가장 큰 상처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주는 거예요. 가족들이 꼭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적들에게 내 시험을 알리지 마라. 이게 제 지론이에요. 적들에게 말하지 마세요. 시험 그냥 몰래 보고 붙으면 만점으로 붙었다고 부풀려서 떵떵 대고, 떨어지면 그냥 입 딱 닫으면 되잖아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 치고 이 시험 만점으로 붙을 사람 한 명도 없어요. 남의 사정 모르는 적들에게 우리 사정을 숨기자고요."
강사님은 수업 중에도 자꾸만 반복해서 말하였다. 자격증반은 짧은 시간 안에 열심히 달려야 하는 촉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꼭 숙제를 해야 하고 절대 수업에 빠지면 안 된다고.
오늘의 숙제는 커다란 키보드 설명서를 세 번 읽어오기, 한글 프로그램 화면 설명서에 있는 버튼들 외워 오기.
수업이 끝나고 가방을 챙기는 중에 강사님은 내 옆 옆자리 할아버지에게 부르르 쫓아와 다그치듯 권유했다.
"어르신. 저녁에 기본실무와 자격증 두 가지를 같이 하는 반이 있어요. 그것부터 들으셔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이 반은 자격증반이라 기본 실무를 천천히 가르쳐드리지 않아요."
키가 크고 깡 마른 할아버지는 목청이 매우 커서 그냥 말씀하시는데도 교실이 쩌렁쩌렁 울렸다.
"아 나는 그냥 수업 들으면 되니까, 상관없어요. 저녁에는 시간이 없고, 그냥 수업만 들으면 되니까 나 신경 쓰지 말아요."
"아니 다른 분들 진도도 맞춰야 하는데 그냥 들으면 되는 게 아니라... "
대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어떤 합의점을 찾을지 모르겠지만, 그냥 교실을 나섰다. 할아버지는 내일부터 나오지 않을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업 네 시간 내내 버벅대기만 하다가 쉬는 시간에는 담배를 태우고 오셨는지 냄새가 지독해서 마음이 불편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마침 청년지원사업 담당자에게 카톡이 왔다.
수업은 어땠냐는 물음에, 생각보다 어렵고 배울 게 많을 것 같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 정말요?? 어려워요?? 고생하셨어요. 그럼 며칠 뒤에 서류 작성하러 오실 때 뵈어요."
아 맞다. 이 사람 이 훈련을 추천하면서 엄청 쉬운 거라고 아무나 다 따는 자격증이라고 말했었지.
적은 생각보다 너무 많아.
그나저나 내가 이 과정을 잘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