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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카 Mar 21. 2024

작심삼일 X 하루/하루/하루

나의 컴퓨터 학원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에 네 시간. 오전 9시 반부터 오후 1시 반까지. 

직장 다닐 때에 비하면 별거 아닌 스케줄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움의 깊이란 이렇게 광활한 것이었나.

겨우 이튿날 되었는데도 으어어어. 앓는 소리가 배속에서부터 끓어오른다. 


두 번째 날 수업은 단축키에 대한 설명과 적용을 배웠다.

우선 시험에 맞는 프로그램 기본 세팅을 먼저 해두어야 한다. 

한글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F7을 누르면 용지 설정을 할 수 있는 창이 뜬다. 왜 이렇게 용지를 설정해야 하는지 분명 설명을 해주었지만, 그냥 일단 외우기로.


그리고 자주 사용하는 단축키를 쭉 알려주었는데, 대부분이 회사에서 자주 사용하던 것들이라 익숙했지만 그래도 노트에 받아 적으며 조금이라도 생소한 부분은 파란색 빨간색 펜으로 밑줄을 그어댔다.

나는 내 공부 방법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다. 꼼꼼함을 넘어서서 느릿느릿 효율성이 떨어진다. 

회사에서도 다른 동기들은 당장 필요한 것만 금방 익혀서 척척 해낼 때, 지혼자 연구하고 복습하고 필기하고.. 나만의 방법을 찾겠노라 고집을 피워대서, 나는 '오래 두고 보살펴서 꽃 피우는' 그런 사람이었다. 

요즘 사회에서 이런 성미는 지팔지꼰일 뿐이다.('지 팔자 지가 꼰다'는 말의 줄임말.)


선생님은 나를 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아는 건데도 여러 번 다시 보는 거죠? 그렇게 공부하면 무조건 만점이에요. 수업만 안 빠지고 그렇게만 쭉 하면 시험 세 과목 모두 만점 받을 거예요. 저번 기수 때 딱 그 자리에 앉았던 젊은 여자분이 그렇게 공부해서 만점 받았어서 생각이 나네요."

부모님 세대의 얼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미소 짓고 있었지만, 속으로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부정했다.

'헤헤..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데요..'

옆 옆 자리 할아버지는 오늘도 버벅대고 있었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다리를 꼬고 가래를 끓이며 기침을 자주 하셨다. 


"여러분 제가 사실 오늘 별로 몸이 안 좋아요. 재작년에 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분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딱 하루 슬퍼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평소처럼 수업을 했었거든요?

그렇게 그냥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덕분에 여러 병을 얻었어요. 눈앞에 점 막 보이는 그런 병이 있어요. 그거도 걸렸어요.

(맨 앞자리에 중년의 여성분을 보며) 너무 힘들면 내 몸부터 생각해야 해요. 아시겠죠? 근데 저는 그걸 안 해서 이렇게 병을 얻었잖아요. 


이 반에 이십 대는 없죠? 지난 기수에 굉장히 열심히 수업 듣고 한 번도 안 빠진 젊은 여자분이 계셨어요. 무조건 만점이겠다 싶었는데 시험날에 갑자기 기별도 없이 안 나오더라고요. 연락을 해도 안 받고.

나중에 물으니, 시험 공포증이 있대요. 그래서 제가 그 아가씨한테 말해줬어요.

'지금 이거 못 이겨내면 다음이 없다. 지금 이 시험만 이겨내면 사회에 나가서 그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지금 한 번만 이겨내자.'

죽을 것 같아도 극복할 수 있어요. 각자의 아픔이 다 있겠죠? 죽을 것 같아도 극복은 할 수 있어. 이게 제 지론이에요.

근데 저 같은 경우는 좀 그러지 말았어야 하나 봐요. 무튼 쉬는 시간 15분 가지세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수업을 좀 열심히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학원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곰곰이 고민에 빠졌다.

최근에 작은 출판사에 연락이 닿아 미팅이 잡혔고, 지난 몇 개월간 벌려둔 일정들이 겹겹이 쌓여서 내일 하루는 정말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아도 극복할 수 있다는 말과 그럼에도 너무 힘들면 내 몸부터 생각해야 한다는 말 중에 계속 고민을 하다 늦은 밤이 되었고, 사실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다른 학생들 보기에 부끄러워서 수업을 빠지기 민망하단 진심임을 인정하게 되자 시원하게 선생님께 결석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내었다. 


'하루만 빠지는 건데 뭐, 일단 내가 힘든데 어떻게 해.

내가 컴퓨터 클릭 클릭클릭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는데 뭐.'

구구절절 스스로에게만 핑계를 늘어뜨렸고, 이미 설렘이 가득한 나머지 클릭클릭 컴퓨터 학원 결석은 그다지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결석을 감행하고 나선 미팅도 여러 일정도 정신없이 얼기설기 해치우고 집으로 돌아와서 쓰러지듯 소파에 기대자 애먼 생각이 불쑥 솟아났다.

'그냥 수강 취소 할까. 내가 왜 이 수업을 듣고 있지. 해야 하는 것도 넘쳐서 벅찬데.

무슨 이런 시대에 컴퓨터를 배운다고 일을 벌여서 미팅이고 뭐고 다 제대로 해내지도 못하고.

다 컴퓨터 학원 때문이야.'


'아 서라 서. 겨우 이것도 못해내면 안 돼. 다들 이 정도는 해낸다고. 나약하게 생각하니까 힘든 거야. 

중도포기만큼 후회되는 게 없다고. 스스로가 제일 잘 알잖아.'


어쩌다가 이런 수업을 듣게 되었는지, 누구의 소행인지 씩씩대며 원인을 찾으려 들었지만, 

에헴. 저예요 저.


결국 내가 원해서 결정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며 혼자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일단 내일 하루만 더 가자.' 

얄팍한 끈기를 꺼내어 본다.

이럴 때는 '하루만 이틀만' 하며 스스로를 속이고 달래어 끌고 나가는 게 쉽게 친다.

아아- 대학생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바로 수업 째고 놀러 갔는데.


수업시간에 배운 구역 나누기를 활용해야 겠다.

[구역나누기]는 [쪽 나누기]와는 다르게 기존 데이터 중간에 내용을 추가하거나 수정해도 뒤에 입력된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구역 안에서만 추가, 수정될 뿐.

다시 말하면, 위 구역 내용이 어느 정도로 채워졌든 상관없이

새로운 구역에서는 완벽하게 새로운 시작으로 데이터를 적용시킨다.


오늘 (+미팅 준비자료 빠뜨리고 가기, 프로필 촬영용 의상 두고 가서 청바지에 정장 재킷 입고 사진 찍기, 기획 소셜링 커리큘럼 재재수정, 식사까지 거르고 다녔는데 주차비로 이만 원 내기, 학원 숙제 안 함.) 끝. 

- '구역 나누기' - 내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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