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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카 Mar 22. 2024

나의 컴퓨터 학원

겨우 하루 빠졌는데, 놓친 진도의 존재감이 꽤나 크게 느껴졌다.

공부도 공부지만 같이 수업을 듣는 사람들 눈치가 보여서 민망한 마음이 울렁댔지만,

하지만 구역 나누기! 뾰로롱!


오늘 진도는 다행히도 결석한 수업의 내용과 크게 연관되지 않는 내용이라 얼른 적응하여 따라갈 수 있었다.

이 수업. 어르신들 모시고 겨우 인터넷 접속이나 알려주는 수준인데 왜 이렇게 사람을 조급하게 만드는 거지?

묘하다 묘해. 


한글 프로그램 시험은 총 3페이지 구성의 시험지를 프로그램 위에 구현하는 방식으로, 주어진 60분 안에 완료시키기 위해서는 문제를 이해하는 것/문제를 푸는 것/문제를 빨리 푸는 것 이 삼박자를 모두 배워야 한다.

강사님은 어느 정도 진도를 나간 후, 지난 수업에서 배웠던 단축키를 활용하여 오늘 배운 문제를 풀어보도록 미션을 주었다.


컨트롤키와 시프트키는 어떻게 조작하는지에 따라 데이터 선택의 영역이 달라지고 이동 방향도, 양도 제각기 달라진다.

오늘도 손가락이 허둥대는 어르신들 덕분에 나에게는 중간중간 혼자 복습해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이런 짬나는 시간에 나는 필기한 내용을 다시 보고 하나씩 천천히 눌러보기도 하고, 잘 안되거나 중요한 부분에 밑줄을 긋기도 한다. 


어쩌면 이 속도가 나에게 맞는 것 같다. 또래들 속에서는 내가 허둥지둥하는 역할이었는데 이 속에서는 알맞게 숨차지 않게 쫓아갈 수 있어서 느긋한 안도감이 들었다.

그동안 나는 단축키를 잘 사용하지 않아서 속도가 더 느렸었나 보다. ESC 같은 간단한 단축키조차 잘 쓰지 않았었는데, 아주 사소한 시작하고 닫는 과정까지 훈련시켜 주시는 강사님 덕분에 단축키의 참맛을 처음 느끼게 되었다. 

훨씬 빠르고 손쉬운 효과를 느껴 보니, 이 수업을 듣길 잘했다며 기분이 좋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길게 쭉 빨아 마셨다. 


내 앞자리에 아주머니 두 분도 진도에 맞춰 데이터를 입력해 두고 짬이 나서 이것저것 다른 색을 넣어보며 복습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꼭 붙어 앉아서 항상 둘이서만 속닥거리는 아주머니들은 내가 교실에 도착하면 늘 타자연습을 하고 있었다. 수업 시작 전이나 쉬는 시간이나 늘 컴퓨터에 깔려 있는 타자연습을 하며 놀고 계신데, 속도도 나쁘지 않고 수업 진도도 잘 따라오는 편이라 이 분들은 어쩌다 이 수업을 듣게 되었을까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러고 보니, 이 반안에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고개를 들어 교실을 크게 한 바퀴 둘러보았다.


"유민 씨. 애기 유치원 입학식은 잘 다녀왔어요? 입학식은 가야지. 이런 사정은 무조건 미리 말하면 다 출석 처리 해드리니까 여러분 모두 미리 말하세요.

제가 요새 필라테스를 하는데요. 여러 병을 얻었다고 했잖아요. 어깨가 완전히 망가졌는데 의사가 말을 안 들어 정말. 내가 말하면 말을 좀 듣지. 그래서 지금 또 따로 돈 내고 필라테스를 다니잖아요.

사람은 다 때가 있나 봐요. 필라테스 강사님이 그 붕어빵집 아냐고 그러더라고요. 여기 근처에 붕어빵집 있거든요? 거기 사장님들 얼굴 보면 정말 행복하게 하셔요. 그분들 얼굴 보느라고 십 년이 넘게 내가 거기만 가요..

(도대체 뽀글뽀글 강사님의 이야기 흐름은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수업뿐만 아니라 나라에서 훈련 지원하는 연령이 처음에 오십오 세였어요. 그때 제가 정말 어르신들 때문에 고생했어요. 그분들은 노인회관에서 수업을 들으셔야 하는데 여기를 오셔서 저를 개고생 시키더라고요.

그러고 육십사 세로 올랐다가 육십구 세로 올랐다가 지금은 칠십사 세까지 올라갔어요.

지금도 여기 칠십 대 두 분 계시잖아요.

육십 대가 넘으셔서 이 수업에 오시는 어르신은 보통 높은 자리에 계셨거나 지금도 계시더라고요. 본인이 컴퓨터를 알아야 밑에 사람에게 일을 시키니까. 그래서 배우러 오시더라고요. 맞죠?" 


할아버지 두 분은 그냥 허허 웃고 계셨는데, 나는 혹시나 그들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면 어쩌지 싶어서 괜히 땀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크게 개의치 않은 분위기라 내 마음도 이내 진정되었지만 흐음 물음표가 떠올랐다.

'젊은 강사님이었으면 생각 없이 말한다며 속으로 엄청 흉보았을 것 같은데, 복순 강사님께는 그러기가 쉽지 않네.' 


마치 외국 어느 나라의 개그 콘서트를 보러 가서 모두가 이해하고 있는 유머를 두고 나 혼자 웃지 못하는 상황처럼 느껴졌다. 이들은 모두 뽀글뽀글 강사님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저 아직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때인 건가.





"때가 이렇게 길어졌어요. 여러분 재취업하려고 오셨잖아요. 

저도 내년까지만 일하고 쉬엄쉬엄 지내다가 그동안 친구 못 사귄 거 못 논 거 다 노인대학 가서 놀 거예요. 

제 때는 그때니까 여러분 때를 잘 생각해 보세요." 


막내딸 유치원 입학식에 다녀온 사십 대 유민 씨는 동안이라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아 보였다. 컴퓨터를 그렇게 못할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이 수업을 듣을까.

어쩌면 이 어른들이 보았을 때, 가장 막내인 나는 왜 이런 기초컴퓨터 수업을 듣고 있을지 그들도 궁금하려나. 


나는 빡빡한 세상에 조금 지쳤고,

가장 열정적이어야 한다는 내 나이에 조금 지쳤고,

아직 젊은 나이 같기도 하고 조금 늦은 나이인 것 같기도 하고

아무래도 요새 나 애매한 것 같은데. 


나보다 더 늦은 사람들 속에 앉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편안하면서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아주 묘한 기분.

나는 컴퓨터를 배우러 매일 낡은 건물로 간다. 나올 때는 무언가 다른 것도 배워서 나오는 것 같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의 종잡을 수 없는 말들, 같은 반 사람들의 대화, 행동들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무엇이 귀하다고 느껴졌는지 열심히 적고 싶어서 한마디 놓칠까 허겁지겁 적어댔다.

어쩌면 현재 내가 가진 복잡한 응어리들의 실마리를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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