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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치카 Mar 28. 2024

오늘이 아닌 시스템 날짜 =TODAY

나의 컴퓨터 학원

첫 번째 과목인 한글을 마치고, 다음 과목은 엑셀이다. 

엑셀은 예나 지금이나 업무에서 많이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라 한글만큼이나 이미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 많을 거라고 예상했다.


"엑셀을 처음 해보는 분들 손 들어 보세요. 아니면 처음은 아니더라도 정말 하나도 다룰 줄 모르는 분들도 손 들어 보세요." 


꽤나 많은 어른들이 손을 들었다.

나는 순간 내가 잘하는 편인지, 반대인지 고민이 되었지만 수업의 난이도를 어느 정도 파악해 본 결과 이 중에서는 나름의 상위권이 분명하기에 재수 없어 보이지 않게 손을 들지 않았다. 


이번 과목도 역시나 엑셀 화면이 그려져 있고 하나하나 설명을 달아둔 커다란 사이즈의 유인물을 받아 들었다.

"이건 메뉴고, 이건 새문서고, 이건.. "


뱀의 머리가 되어 뱀꼬리들을 둘러볼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허둥지둥 열심히도 수업을 듣고 있다.

여유가 생기니 딴생각이 자꾸 들어서 고개를 가로저어 보았지만, 자꾸만 근래의 나를 괴롭혔던 생각들이 떠오른다.


'이렇게 열심히 무언가 하고 있긴 한데,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이 시간이 결국 필요했던 시간이 아니면 어쩌지..' 


"제 지론이 하나 있어요. ( 강사님은 지론으로 만들어진 지론의 인간 형태일까. )

사춘기도 갱년기도 일찍 안 오면 나중에라도 온다. 이게 제 지론이에요. 저는 아이들에게 항상 말해요. 

엄마도 계속 똑같지 않아. 점점 힘들고 예전 같지 않아. 내가 너희를 꼭 끌어안아줬듯이 너희도 엄마 힘들게 되면 끌어안아 줘라.


저는 애들이 어렸을 때 어디 다쳐 오고 문제가 생겨도 일단 다 괜찮다. 괜찮다. 해줬어요.

제가 어르신들이나 오십 대분들께 "-씨"라고 부르며 막 혼내잖아요. 이 안에서만이라도 학생 입장으로 편안했으면 해서 그래요. 

저는 집 문을 딱 닫고 나올 때 그 안에 전부 두고 나와요. 아픈 거 힘든 거. 여러분도 다 두고 나오세요. 

그래야 살아요. 


저희 엄마가 육 남매를 키웠어요. 근데 제가 지금 엄마한테 말하거든요.

"엄마 바뀌어야 해. 그래야 살아."

자식들이 어디 가자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알았다. 고맙다. 하자. 하고 움직이라고요.

엑셀이 확실히 어려워요. 그래서 저의 교수법은 어려운 내용 중간중간에 농담을 섞어서 환기시켜 드리는 겁니다. 대단하죠? 

자 다들 집에서 나오실 때 저처럼 문 딱 닫으면서 안에 다 넣어두고 나오세요."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야 사는 게 맞는 말인데 그것이 잘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힘든 일이다.

자신감이 넘치고 힘찬 청년의 내가 보이지 않고, 자꾸만 움츠리고 괴롭고. 멋졌던 나는 과거 같고 밝은 미래는 현재의 나태한 내가 갉아먹는 중인 것 같고.


안다. 알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힘들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데 어떡해! 



강사님은 엑셀에서 중요한 것은 참조라고 힘주어 말씀하셨다.

셀을 참조하여야 원본데이터가 변경되었을 때, 자동으로 반영하여 계산한다.

오늘 날짜를 일일이 입력하면 나중에 날짜를 또 일일이 수정하여 저장해야 하지만, 셀에 =TODAY를 세팅하여 참조를 걸어두면 원본 데이터 날짜만 변경되어도 나머지 참조를 걸어둔 셀의 날짜도 자동으로 변경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엑셀에서 =TODAY는 오늘 날짜가 아니라, 시스템의 날짜로 적용된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 날짜가 아니라 해당 PC시스템에 설정된 날짜가 오늘 날짜로 인식되어 적용된다는 뜻이다.

내가 체감하는 오늘과 이 시스템 안에서의 나의 날은 다르다. 그러니, 날짜를 잘 확인할 것. 


"해병대 나온 희현 씨를 보면 우리 아들 생각이 나요. 희현 씨 사십 대인데 내가 너무 놀리죠? 서른 넘어서 누군가에게 혼날 줄은 몰랐지? 호호호. 

아들이 얼마나 자주 다치고 사고를 쳤는지. 근데 그렇게 생각했어요. 얼마나 건강하려고. 얼마나 건강하게 살려고 지금 다치나. 그러니까 내 마음이 덕분에 행복해졌어요.

여러분 재취업하려면 마음 바꿔먹어요. 

사십 넘으면 누구에게 "괜찮다." 소리 바라지 말고 스스로한테 해주는 거예요. " 


엑셀의 기본을 익히기 위해 날짜에 대한 연습을 반복했다.


-오늘날짜 : 0000/00/00

-태어난 날 : 0000/00/00

-살아온 날 : = 오늘날짜 + 태어난 날

-밥값 : 살아온 날 * 3* 7000원 


"평생 먹고살기 위해 돈 벌다 갑니다. 모르겠지만, 우리 다 몇 억 치 밥 안 먹었겠어요? 애들한테도 몇 억 치 밥 안 먹였겠어요? 그 돈 안 썼으면 오늘 저 엄청 부자였을 걸요?

당장 주머니에 가진 거 없어도 큰 빚지지 않고, 잘 먹고 잘 살았잖아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았으면 감사한 거죠." 


나는 이 어른들의 대화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지만, 

뽀글뽀글 복순 강사님과 컴퓨터 앞에 우르르 앉아있는 어른들 속에서 발신자 모를 작은 위로를 받았다. 


남한테 괜찮다는 말 바라지 말고,

몇 억씩 들인 지금의 나. 괜찮다. 세상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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