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2021년 겨울 어쩜 마음씨까지 달콤한 아부다비 안젤리나 졸리
그렇다.
누라는 안젤리나 졸리와 똑 닮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도, 고운 마음씨도 판박이다.
누라를 알게된 건 나의 둘째, 민하가 FS2, Otter Class에 들어가면서부터였다.
민하는 2019년 10월 AIS에 등록했다. 첫째 주하는 2019년 8월 말 Year 3로 시작해서 이미 AIS에 다니고 있던 터였다.
민하의 당시 담임 선생님은 금발의 따스한 미소를 가진 미스 니콜라,
반은 이름도 귀여운 Otter Class(수달반)에 배정되었다.
AIS에서는 매년 학년별 테마를 정해 반에 이름을 붙였는데 2019년도 FS1은 동물이 테마였다.
당시 첫째 주하는 Year3였고 Year3의 테마는 물고기였다.
주하반 이름은 복어를 뜻하는 PufferFish였는데 퍼퍼피쉬라고 발음을 할때 마다 프 소리가 반복되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당시 나는 아부다비에 온지 채 1년이 안되어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이 지금만큼 능숙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영어를 꽤나 잘한다고 생각하고 아부다비로 왔는데, 아부다비에 와서 일상에서 모든 것을 영어로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 오니 한계에 부딪혔다.
아부다비는 아랍어가 공용어이지만 외국인 거주 비율이 80퍼센트 이상으로 높아 영어가 공용어만큼 많이 쓰인다.
또 많은 경우에 아랍어와 영어가 같이 사용된다. 예를 들어 몰의 상점들은 간판을 아랍어와 영어로 함께 표기하고 있다. 식당에 가면 메뉴표는 아랍어 버전, 영어버전 두 개가 있다. 아랍어 사용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가면 아랍어로만 의사소통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때에도 사람들은 대부분 간단한 영어는 구사할 줄 안다. 나는 아랍어는 전혀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집 밖을 나서면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마트나 식당은 물론이고 정부에서 보내는 안내 문자는 아랍어와 영어 버전이 함께 왔다. 학교에서 오는 통신문도 죄다 영어로 이메일이었고, 딸들이 친구들과 놀기 위해 약속을 잡을 때도 그 부모와 어쩔 수 없이 영어로 문자나 통화를 해야했다.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의사소통을 해야하는 상황에 매일 놓이는 것은 긴장감을 늘 안고 살아가야하는 고단한 일이었고, 나의 부족함을 계속 마주해야하는 고달픈 일이었다.
누군가와 영어로 짧은 대화를 나눌 때면 나는 혹 실수를 하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에 부족한 영어 대신 광대를 한껏 치켜올리며 가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 웃음이 나의 부족한 영어실력을 티 안나게 감싸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광대만 아플 뿐, 나의 영어는 식혜를 마시고 남은 몇 알안되는 밥알같았다. 다른 이들의 광활한 영어세계에서 나만 홀로 동동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한낮의 따스한 햇살처럼 내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건 나의 안젤리나 졸리, 누라다.
민하가 AIS에 등록한 후 첫 등굣날이었다. 두근거리며서도 불안함 마음을 부여잡고 민하가 하교하는 시간에 그녀를 데리러 교실로 갔다. 나는 아직은 낯선 수달반 교실에 어디에 시선을 둬야할지 모르는 채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내게 처음 먼저 말을 걸어온 건 누라가 아닌 네이슨의 엄마 나타샤였다. 미쉘 윌리엄스를 닮은 남아공 출신의 금발 컷트를 한 그녀가 경쾌한 꾀꼬리 톤으로 입을 뗐다.
"어머, 안녕하세요. 오늘 새로 들어온 이 여자아이의 엄마인가봐요. 이름이 뭐에요. 아이가 귀엽네요. 저는 나타샤라고 해요. 저희반은 엄마들끼리 반의 정보를 나누기 위해 소통하는 왓츠앱 방이 있어요. 초대해 드릴까요?"
"예스, 오 예스. 네네. 꼭 초대해주세요."
지푸라기를 붙잡은 심정이었다. 학부모들과의 소통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모르던 내게 갑자기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 쬐었다. 그게 나에게 주어진 큰 축복의 시작인 것을 그 때는 알지 못했다. 수달반 왓츠앱방은 그 야말로 나에게 구원의 손길이었다. 학부모들은 이 방에서 학교 준비물에서부터 아이들에 대한 사소하고 개인적인 질문까지 했다. 이 곳에서 플레이데이트 약속을 잡아 엄마들끼리 커피타임을 위해 모이거나, 자녀들을 데리고 만나는 플레이데이트를 잡기도 했다.
나는 제대로 된 엄마들과의 사교를 처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나는 한동안 그 방에 있으면서도 주로 엄마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지 지켜볼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괜히 분위기에 맞지 않는 말을 할까봐 조심스러웠다. 나의 호탕한 평소 성격에 맞지 않게 그 곳에서는 소리나지 않게 걷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움직였다. 영어를 써야하는 순간의 나는 다른 인격체가 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말수가 줄어드니 평소의 나와는 전혀 다른 소심하고 조용한, 신중한 성격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언어가 미치는 힘이 강력하다는 것은 외국어를 사용하는 상황에 자주 놓이게 되면 될 수록 더 많이 느껴졌다.
딸들의 학교 AIS에는 1층에 Aloft 카페가 있다. 교사나 학생들은 이 곳에서 간단한 샌드위치나 샐러드같은 음식을 사서 점심을 해결하기도 했다. 엄마들은 아침에 자녀들을 등교시킨 뒤 또는 오후 시간 하교 전 아이들을 데리러 가기 전 커피 타임을 하는 엄마들로 붐볐다. 또 하교 후 자녀들과 함께 잠시 앉았다 가기도 했다. 그 곳은 학교 내의 사랑방 같은 곳이었다. 나는 어디를 가나 늘 라떼를 주문한다. 여름엔 아이스 라떼, 찬 바람이 불면 핫 라떼. 엄마 말로는 내가 태어나고 이어 연년생 동생이 태어나면서 나는 모유 대신 분유를 먹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 때문에 우유가 들어간 라떼를 유난히 좋아하게 된건 아닌가하고 생각해본다.
나는 그 날도 딸들의 하교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라떼가 생명수인냥 두 손으로 꼭 부여잡고 테이블 한 곳을 차지하고 앉았다. 영어를 사용해야 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있어야 하는 상황과 이제 막 옮긴 새로운 학교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두 가지 환경이 맞물려 나의 내적 긴장은 최고조에 달했다. 낯설음과 서먹함이 범벅되어 길을 잃고 미로 한가운데 서 있는 느낌에 사로잡힌 내 옆을 지나가며 누군가 말을 건넸다. 누라였다. '어제 새로 온 아이의 엄마 아니세요? '
그녀의 표정은 자신감있고 당찼다. 그러면서도 제스추어는 스윗했다. 그녀의 이런 매력을 아는 이들로 그녀의 주변은 이미 북적북적했다. 그 와중에 누구도 소외받지 않도록 모두를 세심하게 챙기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영어로 Embracement라고 하는 포용이 국보급이었다. 그날 누라는 내게 팔찌를 하나 선물했다. 누라의 남편은 사업을 몇 가지 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만들고 있는 것들중 하나라고 했다. 거무스름한 제주도 현무암같은 돌을 비즈로 만들어 엮고 가운데 행운의 상징인 부엉이가 들어 있는 귀여운 팔찌였다. 고맙다는 말도 덜덜 떨며 할 정도로 긴장했던 나를 그녀는 시종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봐 주었다.
그녀는 일부러내가 다른 이들과 잘 섞일 수 있도록 배려심을 가지고 나에게 가벼운 질문을 툭툭 던져 주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향긋한 꽃이 만개한 정원의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정원의 우아한 안주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향긋한 꽃밭이 오라 손짓해도 여전히 마음 속으로는 한 발짝 떼는게 어려웠던 그때, 지금도 긴장의 연속이었던 날들과 그 주위를 감돌고 있던 어색한 공기를 떠올리면 민망함에 손에 땀고 얼굴이 일그러진다. 나에게 친숙한 지금의 아부다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낯선 아부다비가 내 앞에 서 있다. 장소는 시간과 사람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분위기에 따라 다르게 기억된다.
영국계 국제학교에서는 학생들이 상급학년으로 진학할 때 학생들을 잘 섞지 않는다. 그래서 운좋게 누라와는 아부다비를 떠날 때까지 같은 반 학부모로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엄마들과의 만남의 물꼬를 트고 나서도 나는 아부다비에 적응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둘째 민하도 마찬가지였다. 민하가 완전히 학교에 적응하기까지 또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아침마다 교문 앞 주차장에서 얼마나 실랑이를 했는지 모른다. 민하의 언니 주하는 일찌감치 등교시킨 후였다. 민하와 단둘이 차에 남아 1교시 시작 전까지 전쟁을 방불케하는 기싸움이 이어졌다. 매일 아침 등에 식은 땀을 흘리며 그 시간을 보냈다. 민하는 학교에 가기 싫은 마음을 주로 옷과 신발에 투영했다.
'양말이 불편해, 이상해. 벗을거야. 신발이 너무 꼭 끼어서 가기 싫어. 학교 안갈거야.' ,'옷이 불편해, 단추가 싫어. 셔츠때문에 못 움직이겠어.'
지금 생각해보면 민하는 옷과 신발이 불편했던게 아니라 마음이 불폈했던 것이었다. 아침 등교 시간은 가까워 오고 달리 대안이 없었던 나는 아이를 달랬다가 혼냈다가 윽박질렀다가를 반복하며 겨우 학교 1층 카페까지 데려갔다. 등교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초콜렛 머핀을 먹는 그녀와 카페에 앉아 나도 커피를 홀짝홀짝 들이켰다. 고지를 눈 앞에 두었다고 생각하는 찰나, 그녀는 또 안가겠다고 마음을 바꿔먹는다. 휴.. 답도 없는 등교 시간은 지옥과 같았다. 하지만 나보다 더 힘들었던건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등교했던 그녀겠지.
재미있는 사실은 후에 민하가 학교에서 반장을 할 정도로 적극적인 아이로 변했다는 것이다. 시간은 흘러 2022년 9월, 민하가 AIS에 다닌지 3년쯤 되었을 때이다. 당시 민하의 담임은 아일랜드 출신 남자 선생님, 미스터 대런이었다. 줌으로 담임 면담을 했다. 그를 처음 만났다. 그는 20대 후반 또는 그보다 앳되어 보였다. 줌으로 대화하는 동안 귀가 빨개지거나 수줍게 웃는 등 순수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교육철학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는 나이에 비해서 강단있고 철학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민하는 미스터 대런을 잘 따랐고 이어 반장에 입후보해 당선되었다. 울고 불고 학교에 안가겠다고 하던 아이가 3년 만에 반장이 된 것이다. 2022년 8월의 마지막주였다. 한국에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민하에게 말해주었더니, 민하는 그걸 반장선거때 반 아이들에게 당선을 위한 도구로 써먹었다.
'나는 얼마 안있으면 한국으로 돌아가. 그 전에 이 곳에서 반장으로 너희들이 잘 지내게 돕고 싶어. 재미있게 지내고 싶어.'라고 연설을 했다고 한다.
그녀는 학교에서 하는 스포츠 클럽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넷볼, 풋볼, 수영팀에 들어가 센터로 활약하거나 실적을 내기도 했다. 지금도 아부다비에서 있었던 날들을 가만 떠올리면 딸들이 다른 학교와의 스포츠 경기에 참전했던 때가 강렬하다. 목이 터져라 딸들을 응원했던 그 시간들이 떠오른다. 경기장에서는 팔불출이 되어도 뭐라고 할 이가 없었다. 그녀들을 온 마음으로 지지하는 엄마의 심정을 고스란히 전달해줄수 있던 그 시간들이 참으로 소중했다. 그리고 그 옆에 항상 누라가 있었다.
누라에게는 자녀가 세명이다. 첫째 남자아이 아이사, 둘째 라나, 셋째 마야이다. 둘째 라나와 민하는 반에서 친구로 만나게 되었고, 나와 누라도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2019년 10월. 이 곳은 한국과 달리 학기가 9월에 시작한다. 나의 둘째는 유치원 2년차인 FS2에 입학하게 되어고 그곳에서 첫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중 한 명이 지금도 베스트 프렌드로 남은 라나다. 그리고 그 엄마가 엄마가 내 친구 누라다. 누라는 팔레스타인출신 캐나다인으로 이곳 아부다비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다. 영어와 아랍어를 이중언어로 완벽하게 구사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특히 많은 사람을 챙기고 어울리게 하는 격이 재주를 지녔다. 딸들이 하교하고 나는 그녀와 자주 시간을 보냈다. 아미티 라운지의 의자에 앉아 사는 이야기를 쏟아내고 자녀들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함께 들어주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나와 그녀의 아이들은 방과후교실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일들이 종종 있었기에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지금이나 그 때나 그녀는 마주치는 누구에게나 다정하고 따뜻하게 인사를 건네며 상대방을 무장해제시키는 힘이 있다. 새로운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과 새로운 환경을 맞딱뜨려야 하는 나에게 그녀가 내민 따뜻한 손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그녀는 종종 나를 생각해주고 찾아주고 이런저런 모임이나 행사에 빠뜨리지 않고 나를 초대해주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차차 아미티라는 학교에 대해서 마음을 열게 되었고 누라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학교에 대해 잘 알게 되지도, 사람들과 가까워지지도 못해을 것이다.
한번은 둘째 아이가 학교에서 코로나에 감염이 되어 우리 가족이 몽땅 2주동안 집에서 격리를 하게 된 적이 있었다. 많이 아프진 않았지만 그저 답답함을 견디고 오르내리는 열을 해열제로 달래며 집에 갇혀있는 것이 힘들었다.
그때 누라는 엄청난 스케일의 5킬로 냄비에 치킨수프를 가득 끓여 우리 집에 배달해 주었다. 나는 뭐라 할말이 없을 정도로 감동을 받았다.. 그녀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에 시부모님도 집에 와 계셔서 본인도 정말로 시간이 없었을 때인데.. 그 와중에도 나를 이렇게나 생각해 주어서 우리가족은 정말 그 수프로 몇일을 견딜수 있었다. 영양전문가인 누라가 우리를 생각해서 끓인 치킨수프에는 치킨과 야채들이 푹 삶겨져 먹을 때마다 힘이 났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서 내 시간과 노력을 아껴가며 이렇게 잘 해준적이 있던가.. 하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그녀는 언제나 내게 감동과 영감을 주며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가 내 친구여서.. 나와 아이들의 아부다비에서의 시간들은 외롭지 않고 풍성해졌다. 한국에 가기 전에 이 빚을 다 갚을수 있을까.. 아마 나는 평생동안 이 것을 마음의 빚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마음에 그녀를 위해 내어줄 작은 공간을 언제가 남겨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