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한국에서 잘살고 있다- 반 학생들이 각종 상을 휩쓸다
2024년 3월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13년만의 복직이었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으로 7년,
동반자 휴직으로 4년,
연수휴직으로 1년,
자율연수휴직으로 1년을 쉬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하는데 학교는 얼마나,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영어전담교사를 희망했다.
하지만 5학년 4반에 교통안전업무로 배정되었다.
아쉬웠지만 내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했다.
당시 5학년에 4개의 반이 있는데,
그중 1-3반은 부장 선생님을 비롯해 모두 남자선생님이셨다.
여초현상이 심한 초등교직사회에서 흔하지 않은 풍경이었다.
그들은 보통 남자선생님들이 아니었다. 2024년은 1반 차부장님, 2반 김선생님, 3반 송선생님과 함께 근무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학교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학교 업무는 A부터 Z까지 아는게 없었고, 휴직 전과 완전히 다르게 바뀐 시스템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미안함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하루 종일 울려대는 학교 내부 연락망 메신저의 반도 소화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까막눈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업무처리시스템인 나이스와 에듀파인은 한동안 나에게 미지의 암호같았다. 나는 교사계의 부진아였다. 그런 나를 댄디하고 명석한 부장님과 따뜻하고 지혜로운 2반 선생님, 반듯하고 사려 깊으며 열정을 가진 3반 선생님이 합동으로 겨우 부진에서 구제해 준 것이다. 어쩌면 나는 지금도 부진의 늪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곤란한 상황에 놓일 때마다 곧장 팔을 걷어붙이고 달려와준 그들이 있었기에 막연하고 곤욕스러웠던 일들도 그저 그렇게 아무일도 아닌 것처럼 지나갔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기를 냈다. 나는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꽃보다 남자 F4 중 한명처럼 머리를 짧게 깎을 수도 있었다. 절실함은 극도에 달했다.
“선생님, 나이스에 복무를 어떻게 올리는지, 어디에 가서 상신한 걸 확인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공문은 어디에 들어가서 작성하고 교육청으로 수신을 지정하려면 무슨 단추를 눌러야 하나요” 이런 기본적인 업무에 관한 것부터 “선생님, 아이 둘이 싸우는데 학부모에게 어떻게 안내하고 설명할지 막막해요.” 하는 학생지도도, “학교종이에 안내문을 올려야 하는데 어떻게 문서 첨부를 하나요?” “선생님, 수행평가계획은 뭘 보고 수정해야하는지 담당자의 쪽지를 보고도 모르겠어요.” 하는 교육과정 관련한 것까지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정말 지겹도록 선생님들을 불러서 도움을 구했다.
그럴 때마다 1반 선생님은
“아~ 그거요. 쉬워요. 여기 이거 보이시죠? 찾으셨어요? 괜찮아요. 다 그래요. 혹시 못 찾으시겠으면 제가 지금 교실로 가서 도와드릴게요.”하고 다정하게 알려주셨고,
2반 선생님은
“네~ 제가 2교시에 전담시간인데 그때 도와드려도 될까요? 저도 맨날 헤매요. 다 그래요. 선생님만 그런거 아니에요.” 하며 본인의 쉬는 시간까지 할애해 가며 차근차근 도와주셨다.
3반 선생님은 내 옆반이라는 죄로
“어.. 지금 갈게요, 쌤! 저는 그것보다 더한 실수 한적 많아요. 다 그렇죠 뭐.”하며 문제상황마다 해결사처럼 등장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선생님만 그런 거 아니에요. 선생님은 혼자가 아니에요. 누구나 그럴 수 있어요’ 라는 메시지의 말을 꼭 붙이셨다. 이 말들이 나를 살게 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만 부진인 것 같다. 나를 도와달라고 하기 미안하다. 다른 사람은 아무 문제없이 잘하는 것 같다’고. 그들은 내 마음이 투명하게 보이기라도 하는 듯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늘 구렁텅이에서 꺼내어 주었다.
반에 다루기 힘든 남학생이 있을 때에도 어느 반 선생님 할 것없이 나를 도와주셔서 힘든 상황을 수훨하게 넘긴게 한두번이 아니다. 세 분의 선생님이 모두 나보다 어리고 미혼이고 교육경력이 적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고 배울 점을 많이 나누어준 동료 교사 그 이상의 은인들이었다. 전담 시간이 겹칠때는 교사로 살기에 힘겨운 날들에 대해 같이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의 인생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하루는 세 분이 내가 알지 못하게 학교 앞 베이커리에서 작은 케잌을 사서 연구실에 모여서 나를 불렀다. 내 생일이었다. 세 분께서 입모아 생일축하노래를 불러주었을 때에는 이곳이 직장이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그들의 따뜻함에 뭉클해 눈물이 났다. 2023년은 한국에 귀임한 지 1년이 갓 지났을 때였다. 아직 한국은 낯설고 학교도 어색한 내게 두팔 벌려 나를 맞아준 그들 때문에 나는 기본적인 학교일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도전을 시도할 수 있게 되었다.
반 학생들을 데리고 경남도민일보 글쓰기 대회, 응급구조UCC동영상제작대회, 경남교통문화그림그리기대회, 경남어문학회 한글날홍보동영상만들기 대회등에 출전했고 학생들은 모든 대회에서 수상을 하는 영예를 안았다. 도민일보 글쓰기 대회에서는 특히 글씨가 비뚤고 평소 글쓰기를 즐겨하지 않았던 학생이 대회를 계기로 글쓰기에 재미를 붙여 새벽까지 글을 쓰고 또 고쳐서 수상까지 하게 되는 것을 보았다. 응급구조UCC대회에서도 평소 애니메이션 동영상을 만드는 것을 취미로 하던 남학생이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도대회 1등 자격으로 전국대회에 출전하는 경험을 했고, 그림그리기 대회에서도 평소 조용하던 여학생이 두각을 나타내어 수상을 했다. 한글날우리말사랑동영상 제작때에도 평소 재잘거리고 귀엽게만 보이던 여학생들이 기발하고 멋진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쳐 2등상을 받았다.
교사로서 학생들이 자신이 가진 보석을 반짝하고 드러낼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2023년은 그래서 교직생활을 하면서 나에게 의미가 있는 해였다. 위 대회들 말고도 소고춤 공연을 위해 5학년 학생들과 동아리를 운영해서 공연하면서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하던 남자아이들이 한국무용으로 진로를 생각하겠다 하여 놀라기도 했었다.
앞으로도 교사로서 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알려줄것인가보다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영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영어 자체를 잘하는 사람보다 영어라는 도구 통해서 본인들이 가진 것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지, 또는 영어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지 알게 해주고 싶다. 나에게 외국어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에게 소통의 끈으로 따스하게 연결될 수 있는 가느다란 실같은 교사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