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학을 공부하고 영어 영문학을 복수 전공할 때만 해도 사업은 나와 거리가 먼 일이었다. 하지만 대학 졸업 후 한 회사의 해외 영업 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알 수 있었다. 직장인은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을. 8시에 출근해서 유니폼을 입고 일을 하다가 8시에 퇴근하는 삶. 운이 좋으면 7시. 하늘을 올려다보길 좋아하고,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극도로 괴로워하는 나에게는 고문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퇴사를 앞두고 있는 선임이 나의 사수가 되면서 자명해졌다. 그분은 친절했고, 업무에 있어서도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유능해서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퇴사를 한다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분의 모습이 아마도 나의 5년 뒤 모습이겠구나. ' 그리고 나는 그 시기를 많이 앞당기기로 했다.
아무 대책 없이 회사를 나와서는 영어 강사, 번역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뭘까?'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fashion이라는 단어에 이르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좋아해 온 것, 그것은 바로 옷을 보는 일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대중적이지 않은 옷들이 좋았다. 시대를 지나며 생존해 온 빈티지 옷은 가치 있어 보였고, 정형화되지 않은 보헤미안 스타일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단정하기만 하고, 천편일률적인 옷들은 재미가 없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옷이었어!'
나는 패션 공부를 하기 위해서 영국의 세인트마틴, 뉴욕의 FIT 유학을 알아봤다. 포트폴리오 등의 아무 준비도 없이 뉴욕에 가서 입학 담당자를 만났고학비를 들은 나는 결심했다. '돈부터 벌어야겠네'
옷을 좋아하면서도 쇼핑에 돈을 많이 쓰는 편은 아니었는데 자꾸 나를 궁금하게 만드는 쇼핑몰이 있었다. 언니와 동생이 같이 하는 그곳은 사진이라든지 글의 형태가 흡사 '조조,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같은 일본 영화의 감성이 있었다. 사진을 찍는 것, 돌아다니는 것, 좋아하는 옷을 골라 사람들과 공유하는 모든 작업을 보며 가슴이 또다시 뛰었다. 당시 나에게는 아르바이트로 모아둔 500만 원이 있었다. 쇼핑몰 창업 과정을 보니 좋은 카메라가 필요하다기에 350만 원으로 DSLR 카메라를 샀다. 그리고 나머지 100만 원은 홈페이지를 만드는 것에, 나머지 금액은 옷을 사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나의 쇼핑몰 오픈은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졌다. 누가 생각해도, 빨리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엉성하고 대책 없는 시작이었다. 자유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삶이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