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체

내 안에 있는 당신의 흔적

by 친절한 곰님

'사망'이라는 단어에 나는 소머즈가 된다. (소머즈는 1970년대 미국 드라마로 오른쪽 귀가 특별히 뛰어나서 작은 소리도 잘 듣는 초능력자인 여자주인공이 나오는 드라마 제목이다) 다른 단어보다 유독 '사망'에 나의 귀가 커지는 것은 1년 동안 사망신고를 접수하는 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오늘도 사망신고를 하러 왔다는 문의를 듣고 나는 손을 번쩍 들어 나의 옆자리로 민원인을 안내한다.


나이 지긋한 남자 어르신이 느릿한 발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오신다. 1년 동안 사망신고를 받아본 경험상 신고인이 남자어르신인 경우 부인의 사망신고를 할 확률이 높다.


나의 예상대로 그분은 부인의 사망신고를 하러 오셨다. 나는 사망신고서의 정확한 작성을 위해 사망자의 한자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를 알려드린다. 어르신은 알고 있다는 짧은 답과 함께 떨리는 손이지만 깔끔한 정자체로 사망신고서를 작성하신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낯선 타인이 글씨를 쓰는 장면이 나의 감정선을 건드린 것이다. 사망신고서라는 특수한 서류를 작성하느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시선은 느릿한 속도로 움직이는 볼펜 끝을 따라간다. 사방이 조용하고 경건해진다.


사망신고를 작성하는 어르신과 나눈 대화라고는 사망신고 작성방법이나 향후 처리 일정이 전부인데 왜 나는 그분의 슬픔을 공감하는 것일까.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는 모습에서 돌아가신 분과의 돈독했을 관계가 느껴진다.


어르신은 사망신고서의 첫 번째 공란인 사망자의 이름을 쓰면서 혹시 두 분이 처음 만났을 때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던 때를 기억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사망 장소를 적으면서 임종의 순간을 다시 생각하고 계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복잡하게 나의 머릿속을 스친다.


흔히 볼 수 있는 검은색 볼펜을 바르게 잡고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써 내려가던 글씨체에 어르신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손 떨림으로 인해 가로획이나 세로획에는 살짝 흔들림이 있지만 정갈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글씨체였다.


사망신고서라는 행정서류는 작성 방법이 간단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다양한 사람들은 만났다. 한자를 안 써봐서 모르니 대신 써달라고 하는 사람, 혹시나 실수로 오타가 생기면 검은색 볼펜으로 까맣게 칠해버리는 사람, 나의 안내보다 빨리 써 내려가서 기어이 실수를 하는 사람, 사망자의 이름란의 빈 공간에 볼펜 끝을 올려놓고 한참을 망설이는 사람.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빈칸을 채우는 서류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돌아가신 분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며 마음을 정리하는 편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마다 지문이 다르듯이 글씨체도 다르다. 글씨체가 '뇌의 흔적'이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이 말을 빌리자면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는 사람의 글씨체는 그의 머릿속에 있는 망자에 대한 기억의 흔적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사망신고서를 작성하는 분과 사망자의 살아생전 관계가 생각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씨는 손이나 팔이 아닌 뇌로 쓴다. 글씨는 '뇌의 흔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체는 바로 그 사람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_구본진, 필체를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 사진출저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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