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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아래 Nov 02. 2024

어둠을 먼저 깔아요


한 달 전부터 일주일에 한 번, 매주 토요일 오일파스텔화를 배우고 있다.

처음엔 잘 그려진 하늘 그림을 모작하다가, 지난주부터는 아무래도 기초를 배워야겠다며 선생님께서 내게 정물을 그리도록 하셨다.


사과를 진짜 사과같이 그리기 위해서는 빨간색과 초록색 말고도 많은 색이 필요하다.

과정을 잠시 설명하자면, 연필로 스케치된 그림 위로 제일 먼저 회색을 칠한다.

선생님의 표현대로라면 '어둠을 깔아준다'. 가장 어두운 곳은 진한 회색으로, 나머지는 연한 회색으로 어둠의 면을 표시해 준다.

내 눈에 보이는 사과에는 회색이 없지만, 선생님의 눈에는 보인다고 했다.

회색을 깔지 않고 색을 올리면 그림이 촌스러워진다고, 밋밋하고 초등학생의 그림처럼 보인다고.

여러 층으로 색을 올려야 밀도가 생기고 그림이 멋있어진다고 한다.

회색으로 어둠을 깔아주고 난 다음에는 주색상을 그 위로 덧칠한다.

그리곤 다시 더 어두운색으로 어둠을 넣어주고, 밝은 부분을 강조하고, 그다음 어둠과 밝음을 자연스럽게 문질러 경계를 풀어준다.

마지막으로 사과가 드리운 그림자를 빛의 세기에 비례하여 어둡게 넣어주면 완성이다.

하나의 말갛고 예쁜 빨간색으로 칠한 사과는 예쁘긴 하지만 진짜 같지가 않다.

정물화 속 사과는 회색 어둠 위로 다양한 채도와 명도의 빨강이 모여 완성되는 진짜 사과보다 더 사과 같은 모습이다.

사과의 영혼을 한순간 포착하여 종이에 담은 것 같달까.

이 포착은 영혼의 명암을 더욱 강렬하게, 확실하게 드러내준다.

그 속에서 사과의 주색이 선명하게 자신의 개성을 보여주면 내가 포착해낸 사과는 이제 세상 어느 사과와도 같지가 않다.


예쁜 가짜로 살지, 어둠과 그림자를 드리운 진짜로 살지를 묻는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우린 태어난 순간 진짜이므로, 필연적으로 어둠과 그림자를 드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쁘기만한 진짜는 없다. 그건 교묘한 가짜일 뿐.

살아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죽음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은 상처받고 찢어지고 아문 흉터들로 얼룩덜룩 해진다.

사과의 주색을 올리기 전에 깔아준 어두운 회색처럼 생은 이미 태어나는 순간 고통을 기본값으로 깔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봄이 오면 다시 잎을 틔우고 완벽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 시듦과 짐 마저도 살아있는 것의 완벽함이다.

요즘 점점 진짜 같은 가짜들이 나온다.

어둠과 그림자마저도 그려 넣은 가짜들이.

하지만 제아무리 그래도 향기를 뿜지 못한다.

오래 곁에 있으면 알아챌 수밖에 없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자기의 향이 있다.

그리고 저마다의 온도와 습기가 있다.



어둠을 깔지 않고 색을 올리면 촌스러워진다고, 밋밋하고 어린아이의 것 같다고, 여러 층으로 색을 올려야 밀도가 생기고 멋있어진다고 했다.

바로 삶이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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