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단어를 최초로 사용한 이의 저질스러운 사고방식에 반응할 가치도 없지만, 동시에 그 말이 갖는 무게를 생각해 본다.
'개만도 못한 인간',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상용구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은연중에 인간이 개나 돼지보다 우월한 종임을 의심치 않고 있다.
우리는 최상위 포식자로서 꽤 오랫동안 지구상에 널리 생존하고 있다.
인간의 DNA에 각인되어 내려오는 우월감을 느낀다.
내가 개나 돼지보다는 낫다는 것을.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인간을 개와 돼지보다 나은 종으로 규정하게 만들었나.
지구상 그 수많은 종들 중에 가장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고 진보해 온 인류는 반드시 다른 종들과 차별화된 특성이 있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연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뛰어난 두뇌와 사고의 힘은 결국 우리를 연대하는 쪽으로 이끌었다.
단순히 생존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무리를 짓고 살아가는 것과는 다르다.
고차원적인 수준에서 인간의 연대는 법과 제도를 만들어 본연의 악의를 견제하고자 합의하였고, 그에 따라 보다 안전한 사회를 구축하여 종의 안정적인 번식을 이끌었다.
그런데 일부 개돼지 같은 자들이 인간을 자기 수준으로 떨어뜨리려고 한다.
실은 개돼지만도 못한 자들이다.
개돼지는 그저 자기 밥그릇을 챙기는 것뿐이지만, 그들은 교묘하게 남의 밥그릇을 엎어버리거나 뺏어서 자기 몫을 더 챙긴다.
개돼지처럼 살지 말자.
악한 이는 인간을 개돼지처럼 생각하며, 더 나쁜 것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다.
개돼지는 연대하지 않는다.
오늘 하루 내 앞에 당장의 먹거리와 비와 추위를 피할 집이 있으면 된다.
다른 개돼지의 먹거리와 집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돌고 돌아 나에게 돌아온다.
나는 먹거리와 집이 없고, 다른 개돼지들은 그걸 걱정하지 않으며, 혹은 당연하거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은 누구나 개돼지가 될 수 있다.
우리 안 어딘가에 노예근성, 즉 주체성을 포기하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악의가 있다.
그런 노예근성이 밖으로 나오는 이유는 인간의 생명체로써의 한계, 자기 생존 본능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인간의 근원적 불안을 건드리는 것은 비겁한 일이다.
먹거리와 집을 사람 수만큼 주지 않고, 적게 줌으로써 서로 경쟁하게 하고, 자기 생존을 위해 일단 다른 이의 생존을 무시하게 만드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인간의 결정적 약점을 건드리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옛날에는 확실히 절대적인 공급이 부족했으므로(여기나 거기나 먹을 게 없는 건 마찬가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적자생존, 약육강식이 될 수밖에 없던 환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우리는 아주 비약적인 공급을 만들어냈다.
한쪽으로 쏠려있는 것을 고루 나누면 된다.
하지만 그들은 자꾸 과거에 굶었던 시절을 상기시키며 겁을 준다.
뼛속 깊이 박혀있는 생존의 위협, 그 쓰라린 상처와 트라우마를 이용해 꼼짝 못 하게 만든다.
개돼지 취급하며 눈앞을 가린다.
비열하고 나쁜 정치인들이다.
인간은 불안에 취약하다.
하지만 우리는 연대함으로써 개돼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당장 내 앞의 먹거리와 집에 안도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다른 이들의 먹거리와 집을 걱정하고, 함께 해결해야만 우리는 모두가 행복한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