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의무가 되는 순간

<사랑은 길고양이 같아서> 20화

by 양창식


사랑이 꼭 하고 싶은 일이어야만 할까?

어느 날부터 사랑은 '해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꼭 챙겨야 하는 식사처럼,

반드시 내야 하는 세금처럼.

그 순간부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무가 되었다.



사랑은 본래 자유로운 감정이다.


마음이 끌리고, 손이 닿고, 말이 닿을 때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것. 그러나 우리 삶의 어느 지점에서는 사랑이 ‘해야 하는 일’이 된다. 부모니까, 배우자니까, 자식이니까.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순간, 우리는 사랑을 감정이 아닌 역할로 수행하기 시작한다.


사랑이 의무가 될 때, 그것은 여전히 진짜 사랑일까?


영화 『블루 발렌타인(Blue Valentine)』은 이 질문에 대한 깊은 울림을 전한다.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가, 시간이 흐르며 책임감과 관성만으로 유지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사랑했던 두 사람은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다정하지 않지만, 여전히 함께 있어야 한다는 책임만 남아 있다. 사랑은 끝났지만, 관계는 남아 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랑을 감정이 아닌, 일종의 과업처럼 수행한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사랑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은, 너무 익숙해서 질문조차 하기 어렵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모든 자식이 그 사랑을 느끼는 것도 아니다. 기시 유스케의 소설 『악인』 속 인물은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자라며 세상과 단절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빈자리는, 사람을 고요하게 무너뜨린다.


사랑은 책임과 만나며 관계로 이어진다. 단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되는 연결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사랑에 ‘유지비’를 부여한다. 그것이 때때로 의무로 느껴지기도 한다. 독일 영화 『토니 에드만(Tony Erdmann)』에서 아버지와 딸은 서로를 분명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너무 오래되고, 너무 현실적이어서 말로 꺼내지 못한다. 결국 사랑은 표현되지 않으면 무뎌지고, 책임만 남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라고 부른다. 간병하는 가족, 아이를 돌보는 부모, 갈등을 억누르며 관계를 유지하는 연인. 이들은 감정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조절하고 통제한다. 자발성이 사라진 자리에는 피로가 남는다. 사랑이 어느새 의무가 되어버릴 때, 마음은 천천히 지쳐간다.


문제는 사랑이 강요되는 순간이다. 사회는 일정한 사랑의 규범을 제시한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불완전한 삶이라 여기고, 가족과의 거리를 두면 차갑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은 누가 정해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느끼는 것이지, 따르는 것이 아니다.


1985년 발표된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의 『시녀 이야기(The Handmaid’s Tale)』는 사랑이 제도에 의해 강요될 때의 위험을 보여준다. 사랑과 출산이 국가의 도구가 되고, 감정은 존재의 자격이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랑이 선택이 아니라 임무가 되고, 결국 억압이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해야 ‘한다’라고 느끼는 순간, 사랑은 자유가 아닌 굴레로 변한다.


사랑은 감정일까, 책임일까?


사실 사랑은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한다. 사랑이 아무런 책임도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너무 가볍고 쉽게 사라진다. 반대로 책임만 있는 사랑은, 감정이 메말라가며 껍데기만 남는다. 중요한 건 그 균형이다. 감정이 자라도록 책임이 따르고, 책임이 버겁지 않도록 감정이 살아 있어야 한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에서 도리언은 사랑을 유희로 여긴다. 그는 감정에는 솔직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을 외면한다. 결국 그 자유로움은 타인을 상처 입히고, 자신을 스스로 파괴한다. 와일드는 말한다. 사랑이 자유롭되, 그 자유로 타인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사랑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라야 한다고.


그러나 책임과 강요는 다르다. 책임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고, 강요는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라는 명령은 사랑을 죽인다. 반면, 스스로 느끼는 책임감은 사랑을 지탱하는 기둥이 된다. 오래된 사랑은 늘 자발성과 책임의 줄타기를 한다.


사랑이 의무가 되는 순간, 우리는 그 사랑을 점검해야 한다. 지금에 이 마음이 내가 원해서 하는 것인지, 아니면 해야 하니까 억지로 하는 것인지. 내가 느끼는 이 책임이 상대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사회가 부여한 기대치인지.


사랑은 의무이기도 하고, 선택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선택이 억압이 아닌 존중에서 시작될 때, 그 사랑은 비로소 진짜가 된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감정을 다듬고, 관계를 지키려 노력하는 순간. 그 노력 속에 진짜 사랑이 깃든다.


결국, 사랑은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되어야 한다. 그럴 때만이 사랑은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고, 조금씩 단단하게 만든다. 사랑은 길고양이처럼, 자유로우면서도 관계를 기억하는 감정이다. 우리가 사랑을 강제로 붙잡지 않을 때, 그 사랑은 우리 곁에 머무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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