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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 종합시장의 이방인

동대문종합시장 견학기

by 후추 Feb 07. 2025

  매서운 2월의 한기가 뼛속까지 스며듭니다. 입춘이 지났다지만, 봄이 오는 걸 막으려는 듯 동장군의 기세가 여전하네요. 정부지원사업 신청서와 씨름하던 일상을 잠시 접어두고, 어제는 노트북을 덮고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매년 이맘때면 찾는 병원 검진과 함께, 오랫동안 구상해왔던 반려동물 베드웨어 프로젝트를 위해 동대문 원단시장을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서울에서 4년이나 살았다는 게 무색하게도, 동대문은 처음이었습니다. 웅장한 동대문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하얀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성곽을 따라 펼쳐진 언덕이 아름다웠고, 6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울의 동쪽을 지켜온 기품에 절로 숙연해졌습니다. 이런 풍경을 왜 진작 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매서운 바람을 피해 동대문종합시장과 평화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청계천을 따라 늘어선 오래된 상점들 사이로, 헌책방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책으로 쌓아올린 벽돌 사이로 고독하게 앉아있는 주인장의 모습이,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보는 듯했습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세월의 향기가 절로 났습니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거리 곳곳에서 마주치는 키릴 문자들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듯한 찬바람을 맞으며, 읽지도 못하는 글자들을 해독해보려 애쓰던 제 모습이 지금 생각하니 우습네요.


  동대문종합시장 상가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1층부터 3층까지 미로처럼 이어진 복도마다 셀 수 없이 많은 원단과 부자재들이 있었습니다. 가죽과 천, 단추와 지퍼까지... 이 광활한 원단의 우주 속에서 저는 작은 우주인이 된 듯했습니다. 혼자서는 이 넓은 우주를 유영하기엔 벅차다는 걸 깨닫고, 다음에는 꼭 경험 많은 디자이너와 함께 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직물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제 기획의 방향을 더욱 선명히 해야겠다는 배움을 얻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하늘 아래, 배움을 얻고 돌아오다 보니 살짝 몸에 열기가 올랐습니다. 이미 봄을 맞이한 듯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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