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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우는 일어나서 냉장고를 뒤벼 반찬통 하나를 꺼내고 서랍장에 마지막 남은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전자레인지가 불이 켜지면서 빨간불빛의 타이머가 움직였다. 전자레인지 타이머가 1초씩 줄어드는 것을 멍하게 쳐다보고는 오늘 할 일을 생각해 봤다.
'분명 오늘은 특별한 날 같은데? 무슨 날이었는지?' 봉우는 전자레인지의 타이머가 2분, 1분 59초, 1분 58초 줄어드는 것을 보고는 그 시간 안에 생각해 내야 한다는 괜한 압박감이 들었다.
결국은 전자레인지의 "띠 띠 띠"소리와 함께 봉우의 머리도 "펑"하면서 터지고는 생각을 멈췄다.
'밥이나 먹자.'
반찬이라고는 며칠 전 봉하에 사시는 어머니가 가져다준 마늘장아찌뿐이다. 그거마저도 마늘은 없고 양념만 남아 있었다. 어젯밤에 안주로 먹은 것을 후회하는 중이었다. 숟가락을 휘이익 저어 마늘장아찌 국물을 한 술 떠서 밥을 비벼 한 술을 들었다.
입안에 마늘과 간장의 향이 퍼질 때쯤 생각이 났다.
'그래! 별밤 책방! 오늘 작가님과 술 먹기로 약속했지.'
봉우는 오늘을 기다렸다. 일주일을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날을 잠시 잊은 자기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퉁퉁 쳤다.
봉우는 별밤 책방이 자기 집 바로 건너편에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꿈만 같았다. 매일을 별밤 책방이 오픈하기만을 기다렸다. 봉우는 민호의 블로그 이웃이었다. 수천 명이 되는 이웃 중 한 명이었다.
봉우는 민호의 블로그 글이 올라왔다는 알림이 뜨기를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읽고는 했다. 그렇다고 댓글이나 좋아요 하트를 남긴 적은 없었다. 그러니 봉우의 존재를 민호는 알 수가 없었다. 민호의 글이 올라오지 않는 날은 봉우는 민호의 이전글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도 수십 번을 본 글도 있을 것이다. 특히 블로그에 연재된 소설을 좋아했다. 그 좋아하던 연재소설이 책으로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누구보다도 먼저 예약주문을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민호가 자기가 살고 있는 원룸 창문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 곳에 별밤 책방을 개업한다는 글이 올라왔을 때는 봉우는 며칠을 설레서 잠을 설쳤다.
봉우는 별밤 책방이 개업 준비하는 기간 동안 하루에 몇 번을 앞에서 서성였다. 밤이 되면 별밤 책방 앞을 괜히 지나가며 통창으로 안을 훔쳐봤다. 심지어 별밤 책방 앞에 누군가가 버린 담배꽁초를 줍기도 했다. 어쩌면 별밤 책방지기 민호보다 더 별밤 책방이 문을 열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봉우는 별밤 책방이 개업하는 날 난생처음 꽃집을 갔다. 개업식에 어울리는 특별한 란을 하나 사서 "개업 축하합니다. 오래된 팬이"이라는 문구를 달고는 별밤 책방으로 향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입안은 빠짝 말라갔다. 양손으로 란을 들고는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레옹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긴장감을 놓고 아무도 볼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레옹은 선글라스를 끼고 알 수 없는 눈웃음을 지었다면 봉우는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아무도 볼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별밤 책방에는 개업식이라고 특별한 화환이나 그런 것이 없었다. 꼭 오래전부터 있던 책방 같았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 봉우는 손에 든 란을 한 번 보고 별밤 책방을 쳐다봤다. 봉우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별밤책방을 지나쳐 집으로 갔다. 조용하게 개업하고 싶어 했던 민호의 마음을 몰랐던 자기 자신을 한탄스럽게 여겼다.
봉우는 란을 집에다 두고 나와서는 별밤 책방 앞에서 서성였다.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없었다. 뻔하게 말은 더듬을 것이고, 그러면 민호가 자기를 이상하게 쳐다볼 것이고, 그러면 별밤 책방은 다시는 갈 수가 없을 것이고 그래서 그냥 조용히 가서 책 한 권만 사기로 했다. 그러나 '오토바이 헬멧을 벗고 갈 것인가? 쓰고 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결국은 헬멧을 벗고 염색을 하고 가기로 결정을 했다.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그날은 지나가 버렸다.
다음날도 책방 앞에서 어스렁 거리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마음을 다지고 별밤 책방 문 앞에 선 날은 민호가 맥주잔을 들고 이마의 주름이 짙게 보일 정도의 무섭고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봉우는 별밤책방을 들어가지 못했다.
민호의 야위어가는 모습은 마치 술에 찌들어있는 사람 같았다. 봉우는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고 한편으로 무서워서 별밤 책방을 멀리 서나 쳐다봤다. 별밤 책방이 개업하고 민호의 소설이 책으로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호의 블로그에 글이 올라왔다는 알림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봉우는 더 불안했다. 혹시나 잘 못 되는 것은 아닌지? 나쁜 생각은 하는 거는 아닌지? 봉우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민호의 생사를 확인하고서는 안심을 했다.
몇 달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어느 날인가 민호의 손에는 맥주잔 대신 책이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민호의 블로그에 글이 올라왔다는 알림이 왔다. 민호의 글은 간단했다.
"작은 방지턱 앞에서 브레이크를 밟은 자기 자신이 후회스럽다. 다시 천천히 나아가야겠다." 짧지만 강렬했다. 민호의 글처럼 민호의 모습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봉우는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염색한 검은 머리는 금방 백발이 되어버렸다. 봉우는 배달일을 하는 것도 있지만 웬만하면 오토바이 헬멧을 잘 벗지 않는다. 별밤 책방 안을 훔쳐볼 때는 헬멧을 벗곤 했다.
그날도 헬멧을 한 손에 들고 별밤 책방으로 달려가서 문이 닫힌 가게를 통창으로 훑어보고 있었다. 그렇게 민호와 마주쳤다.
"딸~랑" 맑고 청아한 풍경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서 오세요."
민호는 최대한 밝고 경쾌하게 인사하면서 일어서 출입문쪽을 쳐다봤다.
"안.. 녕.. 하.. 세. 요.."
봉우는 말을 또 더듬기 시작했다.
"어서 와요. 뽕~~"
민호는 봉우가 편하길 바라면서 "뽕~"을 붙였다.
봉우는 "뽕"소리에 마음이 조금 놓이는 것을 느꼈다.
"시간을 딱 맞춰서 왔네요. 뽕~ 설마 밖에서 기다리다가 온 것은 아니지?"
민호는 봉우가 어색하지 않게 반말을 섞여가며 말을 했다.
"집이.. 저.. 기 건너편입니다. 말.. 편. 하게 하세요."
"그럴까? 뭐 마실래?"
"아.. 무거나 마셔요."
민호는 봉우의 말이 처음과 다르게 금방 편해줬는지 많이 더듬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고는 봉우를 쳐다보고는 엄지를 치켜올려줬다. 민호는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그래야 봉우가 편하게 다가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 시원한 생맥주 하고 새우튀김 어때? 괜찮지?"
"네.. 괜찮습니다."
"그럼 우리 날씨도 시원하고 좋은데 테라스에서 먹는 거 어때?"
"네. 좋아요."
봉우는 민호가 주방에서 새우튀김을 준비하는 동안 통창으로는 볼 수 없던 책방의 구석구석을 훑어봤다. 민호의 블로그 글에서 느꼈던 민호의 감성, 민호의 스타일이 구석구석에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봉우의 스타일이기도 했다. 봉우는 민호의 감성글을 좋아했고, 민호가 올리는 일상의 사진들을 좋아했다.
"뽕~ 책은 나중에 보고 이거 받아. 안주는 내가 금방 해서 들고 갈게."
봉우는 세심하게 500잔에 딱 맞추어 거품까지 따른 생맥주를 들고 테라스로 나갔다. 흔들의자에 앉은 봉우는 눈을 잠시 감았다. 봉하를 떠난 뒤 처음으로 느끼는 편안함이었다. 평온함이다고 말하는 게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마주하고 있는 양산천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그 바람에 실려 오는 나무들의 향이 봉우를 더욱 평온하게 했다.
"자나? 피곤하니?"
"아니요. 이 기... 분을 만.. 끽하고 있었어요."
"무슨 기분? 만끽까지?"
"그냥 모든 게 조.. 아.. 요."
민호는 안주를 테이블에 놓고는 봉우를 보고는 미안함이 섞여 있는 미소를 지었다. 봉우는 그 미소의 의미를 알 수가 있었다.
"새우.. 튀김은 어. 디가고? 오징어?"
"그게 시키는 대로 튀겼는데 잘 안 튀겨져서 실패! 오징어 구워 왔어. 이것도 맛있어."
봉우는 민호를 한심스럽다기보다는 애처롭게 쳐다봤다.
"괜찮아. 뭘 그렇게 쳐다보니?"
"아.. 니.. 요. 어떻게 해요? 그거 못 팔고 버리면 손님도 없는데 어떻게 해요?"
"안 버려. 나중에 잘 먹는 내 친구가 올 거야."
"친구요?"
"있어. 신경 쓰지 말고 오징어 먹어."
"근.. 데요. 어떻게 튀김을 못해요? 탔어요? 아니면?"
"그게 적힌 대로 180도 맞추고 튀김기에 5분을 튀겼는데도 안 튀겨지고 그래."
"제.. 가 한번 봐.. 도 될까요? 그리고 혹시 예열했어요? 튀김.. 기."
"그거 예열해야 돼."
봉우는 처음으로 민호를 한심스럽게 쳐다봤다.
"작가님. 당.. 연한 거 아.. 닙니까?"
봉우는 주방으로 들어가서 이미 뜨거워진 기름이 있는 튀김기를 켜고 눅눅해진 새우를 조심스럽게 집게로 잡아 튀김기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우가 빡빡해지면서 기름 위에 뜨기 시작했다. 봉우는 익숙하게 새우를 건져 휴지 했다.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민호는 입을 가운데 몰아서 다문 채 뭔가를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작. 가.. 님! 타르타르 소.. 스는 있어요?"
"응 마트에서 사놓은 게 있어. 한 번도 안 썼지만."
"네? 한 번도... 안 썼어요?"
"응. 손님이 없었어.."
봉우는 냉장고를 뒤볐다. 마트에 파는 흔한 타르타르소스가 뚜껑도 개봉하지 않은 채 구석에 있었다.
"작.. 가. 님! 잠시만요.."
봉우는 급하게 책방을 나갔다. 민호는 멍하게 봉우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우는 양파와 레몬즙을 들고는 "헉! 헉!" 거리며 나타났다.
"그냥 먹자 새우도 잘 튀겨졌는데."
"안.. 돼요. 제가 금방 소스 맛있게 해.. 드.. 릴레요."
봉우는 말을 더듬기 시작하면서 주방에 도마와 칼을 챙겼다. 민호는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양파를 잘게 써는 봉우의 칼질에 민호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봉우는 기본 타르타르소스에 양파를 추가하고는 레몬즙을 뿌렸다.
"이제.. 가시죠."
봉우는 새우튀김과 소스를 들고는 테라스로 나갔다. 민호는 박수를 치며 뒤따라 갔다. 민호는 우진이와 오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그런지 자주 박수를 쳤다.
"이야~ 맛있다. 봉우! 아까 칼질이 보통 아니던데? 그리고 이 소스맛도 대단하고 뭐야? 주방장이야?"
"하하하. 그냥 드세요. 제가 요리 좀 합니다. 자격증도 있고..."
"아무튼 대단해~ 짠 하자. 오늘 너무 좋다."
"네. 저.. 도 너무 좋아요. 작가님."
"그놈의 작가님 소리 좀 안 하면 안 될까?"
"그럼 뭐.. 라.. 불러요? 작가님을 작가님이.. 라 부르는데? 사장님이라 부를까요?"
봉우는 괜한 말을 한 것은 아닌가 싶어 민호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뭐라 불러요?"까지만 말할 거를 후회했다.
민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이 말을 하고는 500잔을 들었다. 봉우는 잔을 부딪칠 타이밍을 놓칠라 잽싸게 잔을 들었다.
"진.. 짜 형님이라 불러도 돼요? 작가님?"
"또 작가님이라 한다. 그럼 내가 형님이지 누님은 아니잖아? 하하하!"
민호는 자기의 농담이 마음에 들었는지 크게 웃었다. 봉우는 민호의 웃는 게 좋아서 따라 크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