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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새로 시작할 용기가 필요해요.

1-6

by 꾸니왕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제아는 오늘도 천이의 재촉에 집을 나섰다. 제아는 천이를 따라 3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을 뛰다시피 폴짝폴짝 내려왔다. 마지막 계단은 두 칸을 한 번에 폴짝 뛰었다.

1층 공동현관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제아는 폴짝폴짝 뛰면서 내려온 자기 자신을 후회했다. 다시 올라가기에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별밤책방에 책을 반납해야 하는데 책을 놓고 온 것이었다.

한 달 동안 민호가 권하는 책을 읽었다. 신기하게도 민호는 제아의 지금 심정을 아는 것처럼 책을 권했다.

"마음에도 상처가 나면 피가 나요. 그거를 아물게 하는 게 책입니다. 약은 약사에게 책은 민호에게." 세 번째 산책을 하고 처음 책을 권하면서 던진 어설픈 유머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입가에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처음 손에 쥐어준 책은 양희은 님의 에세이 '그러라 그래'였다. 익숙한 양희은 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너무 편하게 읽었다. 그리고 마음속에 담아 혼자 버릇처럼 구시렁거렸다.

"그러라 그래"

그 이후 몇 권의 책들은 내 마음을 차근차근 치료해 주었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초기 소독약을 발라준 책, 연고를 골고루 발라준 책, 아프지 말라고 '호~ '하고 입김을 불어준 책도 있었고. 예쁜 강아지 그림이 그려진 밴드를 떨어지지 않게 꼭 눌려 붙여준 책도 있었다.

어제 읽고 오늘 반납할 책은 상처 치료는 끝났고 흉터 지지 않게 하는 연고를 발라주며 수고했다고 알려준 책 같았다.


제아는 공동현관에 서서 내려온 계단을 쳐다보며 '그냥 갈까?' '아니야 책을 가져다줘야 또 다른 책을 받지.' 갈등을 했다. 결국 폴짝 뛴 마지막 두 계단을 다시 성큼 올라갔다. 다시 올라가는 영문을 모르는 천이는 어찌할지를 몰라 끌려가다시피 올라갔다.

보라색 표지의 예쁜 책이 신발장 앞에 마중 나와 있었다. 책을 들고 나오는데 왼손에 곽진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핸드폰 화면에 '엄마'라는 글자가 보였다. 숨이 막혀 왔다. 제아는 숨을 크게 들이켜고 길게 내뱉었다.

"여보세요."

"이제아! 너 왜 엄마 전화 안 받아?"

"바빴어요..."

"바쁘기는 니가 뭐가 바빠? 다음 주 일요일 대구로 와."

"대구는 왜요? 나 바빠요."

"왜기는. 오라면 와!"

"안 가요."

"이 애가 왜 이래. 토를 달고 그래. 선자리 들어왔으니 이쁘게 하고 와!"

"안 가요."

"애가 정말 너! 왜 그래. 엄마 말 안 들을래."

"이제 그만하세요. 엄마가 결혼하라고 해서 결혼했고 이혼하라고 해서 이혼까지도 했잖아요. 이제는 제발 그만 나 좀 놔줘요. 제발! 제발! 이제 나는 나로 살기로 했어요."

제아는 울분을 토하듯 마지막 말을 하고는 전화를 먼저 끊어 버렸다. 제아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한 달 전만 해도 제아는 엄마 전화가 오면 받기도 전부터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다가 받지 않은 날도 많았다.


제아는 신발장 앞에 마중 나온 책을 들고는 그 자리에 핸드폰을 놓고는 집을 나왔다. 제아의 심장은 백 미터를 16초라는 기록을 경신했을 때처럼 뛰었다. 그 심장에서 내뿜은 감정은 내면에 쌓인 분노와 억울함, 답답함을 표출하면서 나온 해방감과 동시에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상태 같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그래. 고마워 다 너 덕분이야."

제아는 핸드폰 대신 왼손에 쥐어진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책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천이도 그 책을 쓰다듬고 싶은지 폴짝 뛰며 앞발로 책을 '툭툭' 쳤다.

"안돼 천아! 책이 상처 나요. 그러면 책이 아파요."


천이는 제아를 끌고 앞장서서 별밤책방으로 스텝을 경쾌하게 밟으면서 향했다. 별밤책방이 가까워지자 천이는 더욱 빠르고 강하게 목줄을 당겼다. 별밤책방에 도착했을 때는 제아가 천이의 목줄을 강하게 당겼다. 테라스에서 누군가와 맥주를 마시며 환하게 웃고 있는 민호의 모습에 방해를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은 천이와 힘겨루기를 하게 되었다.

"천아~ 그만 가자~ 손님이 있잖아."

"멍~멍~멍"

천이의 크고 굵직한 잦음은 민호가 알아차리기에 충분했다.

"오~ 천이 왔네. 이리 와~"

민호의 목소리를 듣은 천이는 제아를 끌고 민호가 있는 곳으로 갔다.

"천이 왔어! 앉아~기다려~ 뽕우야~ 내 친구 천이야~"

민호의 명령에 긴 혀를 내밀고 앉아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천이의 목덜미를 무릎 꿇고 양손으로 껴안고 쓰다듬었다. 그런 민호가 좋아서 천이는 온몸을 민호에게 던졌다.

"알았어. 기다려. 맛있는 거 줄게."

민호는 큰 새우 한 마리를 들고는 제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줘도 되는지 확답을 기다리는 표정을 했다. 제아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봉우도 제아의 확답을 보고 민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 씨~ 여기 앉으세요."

"아~ 아니에요. 천이 산책 가야죠."

"그렇지요.. 산책을 가야 하는데.. 죄송해요. 선약이 있어서 연락드리려 했는데 연락처를 몰라서 못했어요 괜히 들리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책도 어차피 반납해야 해서 괜찮아요. 그리고 오늘도 양산천 쪽으로 산책 가려고 했어요."

"그래요.. 그러지 말고 잠시만 앉아서 새우튀김하나 먹고 가세요."

"괜.. 찮은데.."

제아가 괜찮다고 손을 흔들고 있을 때 이미 제아 앞에는 나무로 된 흔들의자가 놓여 있었다.

"잠시만 앉아 계세요."

민호는 어느새 접시와 포크를 가져와서는 제아 앞에 놓았다. 그 접시 위에는 살이 통통한 왕새우 한 마리가 제아를 쳐다보며 있었다.

"드셔보세요. 진짜 맛있어요."

제아는 "괜찮은데"하면서 새우를 하나를 반으로 잘라 소스에 찍어 먹었다.

"우와 진짜 맛있네요. 우와 살이 너무 탱글 해요. 이소는 뭐예요? 만든 거예요? 진짜 맛있어요."

"하하 그렇죠. 맛있죠. 이 친구가 했어요."

민호는 양손 손바닥이 하늘을 향해하고는 봉우 쪽으로 팔을 돌렸다. 봉우는 부끄러운지 괜히 천이를 쳐다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손을 저었다.

제아는 왼손으로 입을 가리며 민호에게 귓속말을 했다.

"친구예요?"

"친.. 구.. 아.. 닙.. 니.. 다.. 제가 동.. 생.. 입. 니다."

"미안해요. 제가 초면에 실례했어요."

제아는 귓속말을 봉우에게 들리게 해서 미안한 건지 친구로 봐서 미안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눈을 쌀짝 내리깔고는 볼이 빨갛게 물들었다. 입꼬리는 어색하게 어디에 두어야 될지 몰랐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괜히 주위만 두리번거리면서 미안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그런 제아의 모습에 봉우가 더 미안해서 자리를 몇 번이고 일어서서 "괜찮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하고 했다.

"이제 그만"미안해요."하시고, 봉우도 그만 "괜찮습니다." 해. 그건 그렇고 오늘 제아 씨 표정이 다른 날과 다른데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게 보여요? 음~ 묘한 감정을 지금 느끼고 있어요?"

"어떤 감정요?"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감정요. 아무튼 있어요. 그런 감정."

"궁금하네요? 그런 감정."

"다 민호 씨 덕분이죠. 정확하게는 이 책 덕분에 느꼈어요."

제아는 테이블에 놓인 보라색 표지의 책을 들고 살짝 흔들었다.

"아! 나.. 는 나로 살기.로 했다. 책이네요. 저.. 도 이번에 읽어보려고 했는데 신기하네요."

"그래요. 그럼! 봉우 씨라고 했죠. 그럼 봉우 씨에게도 행운이 오기를 기대하면서 책 바통을 넘기겠습니다. 민호 씨 그래도 되죠?"

"네. 얼마든지요."

민호는 자기가 권한 책이 제아의 감정을 변화시켰다는 것에 어깨가 살짝 올라갔다. 제아가 처음 만났을 때 보다 확실히 밝아졌고 많이 웃는다는 것을 민호도 느꼈다. 제아도 민호가 많이 밝아지고 많이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근데, 봉우 씨는 이 책을 어떻게 알고 읽고 싶었어요? 저는 민호 씨가 권하는 대로 읽었서."

"아~ 작.. 가님이 최근에 블.. 로그에 이 책을 올리고 서평을 올려서."

민호는 작가님이라는 소리에 봉우를 향해 오리입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봉우는 그런 민호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말을 했다. 벌써 편해졌는지 제아 앞에서 말도 처음보다 더듬지 않았다.

제아는 큰 눈을 더욱 부릅뜨고는 민호를 쳐다봤다.

"작가님이세요?"

"작가는 무슨? 아닙니다. 그냥.."

민호가 말끝을 흘리자 제아는 핸드폰을 열고 검색하기 시작했다. '김민호''김민호작가'아무리 검색해도 나오지가 않았다.

"검색이 안 되는데요? 아직 등록이 안 됐나?"

봉우는 갑자기 등을 의자에 붙이고 허리를 꿋꿋하게 하고는 양손 손바닥을 테이블에 올려 폈다. 민호의 고개 흔들며 무언의 압박도 무시한 채 비장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발표할 자세를 취했다.

"그.. 게 작가님 필명이 있어요."

"필명요? 뭔데요?"

봉우는 말 대신 자기 핸드폰으로 검색하고 핸드폰을 제아에게 내밀었다.

"꾸..니왕? 꾸니왕이 필..명이에요?"

"아~ 술이 없네. 술좀 가져올게요."

민호는 제아의 시선을 피해 책방 안으로 들어갔다. 봉우는 독립선언문이라도 읽은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아는 봉우와 머리를 맞대며 핸드폰화면을 쳐다봤다. 봉우는 민호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 권이나 출간했네요."

"네. 한 권은 에.. 세.. 이.. 고, 이번에 출. 간한 책은 소.. 설입니다."

"그래요? 읽고 싶네요. 재밌어요? 어때요? 엄청 궁금하네요."

"네... 재밌어요. 저는 다 읽고 울.. 었어요."

"그래요. 그럼 책방에 신간매대에 있겠네요?"

"그... 게.. 정확한 이유는 모.. 르지만 작가님이 판매를 안 하는 것 같아요, 매대에는 없는 것 같고 소스 만든다고 주방.. 에 들어갔을 때 한쪽구석 박.. 스안에 책이 쌓여 있는 것 같더라고요."

"왜요? 재밌다면서요?"

"그런데 작. 가.. 님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것 같더라고요. 블..로.. 그나 다른 SNS에도 책이야기는 삭제를 하고 언급조차 하지 않더라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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