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민호는 문을 잠그고 별밤 책방을 나섰다.
건널목 앞에서 민호는 보행자 신호를 기다렸다. 건너편에는 낮에 본 할아버지와 옆에서 폴짝폴짝 뛰던 우진이의 모습이 그러졌다. 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신기하다고 생각이 들 때 천이가 민호의 바짓가랑이를 당겼다. 초록불이다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오~ 초록불이다고 알려주는 거야~"
민호는 천이를 봤다가 제아를 쳐다봤다. 제아는 아직 뭐가 부끄러운지 더운지 양쪽볼이 불그스름했다.
"천이가 정말 똑똑한 것 같아요?"
"네....."
둘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서로 천이만 쳐다보고는 걸었다. 횡단보도가 짧은데 초록불 신호가 30초나 되었다. 아마도 천이와 제아씨처럼 애완견과 산책을 하는 주민들이 많아서 그런 듯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둑길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별밤 책방에서 민호의 주방 구석자리에서도 모니터 사이로 통창을 통해 이 계단이 보였다.
"이 계단 이름이 뭔지 알아요?"
"계단 이름이 있어요? 뭔데요? 궁금하네요?"
제아는 괜히 말했나 싶은 표정을 한 채 굼벵이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30 계단요."
"네? 설마 계단이 30 계단이라?"
"맞아요. 제가 붙였어요. 아무도 몰라요. 호호"
제아는 자기가 말하고 오른손 손바닥을 계란을 쥔 모양을 하고 입을 가려서 웃었다. 민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어느 포인트에 웃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한 계단 두 계단 세어가며 마지막 서른 계단에 오른 민호는 해발 300m의 산 정상에 오른 것처럼 숨을 가파르게 쉬었다. 민호는 숨소리를 감추기 위해 별밤 책방을 향해 뒤돌아섰다.
"휴~~~"
민호는 자기도 모르게 아랫배에서부터 올라오는 긴 호흡을 했다. 제아와 천이는 민호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가시죠~"
"괜찮겠어요."
"왜요? 아~ 제가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그래요. 괜찮습니다."
한심스러운 일이었다. 계단 서른 개 오르면서 "헉! 헉!"거려서 괜찮냐는 소리를 들으니 부끄럽고 한심스러웠다.
민호는 다시 심호흡을 하고 양산천을 바라봤다. 건너편 지하철역 역사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천에 반사되어 마치 윤슬처럼 빛났다.
제아는 민호가 향한 곳을 쳐다봤다.
"이쁘죠?"
"네. 이쁘네요."
"설마 여기 처음 온 거는 아니죠?"
"아니요. 제가 여기 둑길에 올라와서 별밤 책방자리를 보고 바로 계약했는걸요."
대화는 또 끊겼다. 서로 말없이 걸었다.
"저기.. 저는 김민호예요."
"아...저는 이제아입니다."
또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천이 잘 있었어?. 살쪘네."
과하다 할 정도로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경보 수준으로 걷던 아주머니가 우리를 지나치다가 다시 팔을 열심히 흔들며 뒷걸음으로 다가와서 천이를 아는 척하고는 다시 급하게 엉덩이를 흔들며 사라졌다.
"누구?"
"잘 몰라요? 가끔 산책길에 마주치면 천이를 알아보고 인사하고 가요."
근육질 남자가 근육을 자랑하며 우리쪽으로 뛰어와서 천이에게 "천이 안녕~"하면서 손을 흔들고 사라졌다 .근육에서 나오는 냄새인지 땀냄새인지 지독한 냄새만 남기고 사라졌다.
"누구?"
"잘 몰라요."
"천이가 유명하네요?"
"하하 맞아요. 천이가 유명해요. 천이가 사실 유기견이었어요. 여기 산책길을 떠돌아 다녔던 개였죠. 그래서 이름도 천이예요. 성은 양 이름은 산천이예요. 그냥 천이~ 천이~ 불러요."
"그렇군요. 근데 어떻게 제아씨와 같이.."
"그거는 다음에 말씀 드릴게요. 근데 책방 너무 오래 비워두는것 아니예요."
"괜찮아요. 어차피 손님도 없는데요.뭐~"
"에이~ 그래도 안되죠. 너무 오래 비워두면.. 그만 돌아가죠."
제아의 "그만 돌아가죠."라는 말을 들은 천이는 제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오던길로 뒤돌아섰다.
천이는 산책이라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듯이 발걸음이 무척 상쾌해보였다. 걷는다는 것보다 통통 뛴다고 해야 어울렸다.
걸어 왔던 길에 비해 돌아 가는 길은 가깝게 느껴졌다.
30계단앞에 선 민호는 별밤 책방에서 빛나는 불빛을 보고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언가를 비장하게 결정하는 표정이었다. 민호의 표정을 본 제아도 아래 입술을 깨문 채 별밤 책방을 쳐다 봤다.
"어디로 가시나요?"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되요. 놀이터 아세요? 거기 옆이예요."
"그래요. 잘가요. 저는 이만~"
"네. 그럼...."
"천이도 안녕~"
천이도 아쉬웠는지 꼬리를 빠르게 흔들며 민호쪽을 힐끔힐끔 돌아서면서 제아를 앞장서서 끌고 갔다. 민호는 왠지 모를 씁쓸함이 싫지 않았다. 다시 만날수 있다는 기대감과 기다림이 더 설레게 만들었다.
제아의 뒷모습이 안보이자 민호는 잘 맞지않은 열쇠를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해서 문을 열고 들어 갔다. 민호는 멍하게 컴퓨터 모니터앞에 앉았다. 오늘 하루는 숨을 쉬며 살아온 것 같았다.
우연히 찾아온 우진이에게서 책이 품어주는 포근함을 다시 느끼게 되었고, 제아 덕분에 사람이 품어주는 평온함을 느낀것 같았다.
소설가가 되면 "우와" 하고 모두가 부러워하며 동경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도 찾지 않는 책방에 혼자 매일 술을 마시고 있는 현실이 자신의 현실이라는 걸 인정하는 순간 억울해서 못 살 것 같아 술을 더 찾게되고, 정신없을 정도로 술을 마시면 출판사 때문이라는 되도 아닌 핑계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 시키기도 했다.
뜬 구름 잡겠다고 정신 못차리고 술로 하루하루 보내던 자신에게 누군가가 도저히 안되겠다싶어서 우진이를 보내주고,제아를 보내 준 것 같았다.
우진이는 마음을 일어서게 했다면, 제아는 몸을 일어 서게 해주었다.
민호는 그렇게 한 달을 매일 우진이와 낮에는 책을 읽었고, 밤에는 천이의 목줄을 잡고 제아와 산책을 했다. 그렇다고 별밤 책방이 달라진 것은 없었다. 별밤 책방이 잘되기 위해 뭔가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책만 읽고 산책만 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한달동안 별밤 책방도 민호처럼 변화를 준비하고는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