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우거진 풀 숲에도 길은 난다.

아픈 강아지를 돌본다는 것.

by 윤선

우거진 풀숲에 처음 발을 들이면 길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고, 키 큰 풀들이 앞을 가로막는다.

발밑이 보이지 않아 한 걸음 내딛기도 조심스럽다.


콩이가 당뇨 확진을 받았을 때가 딱 그랬다.

눈앞이 하얘지고,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였다.

그 책임은 너무 크고, 그 풀숲은 너무 우거져 있었다.


하지만 꼭 길이 없는 것 같아도, 누군가 먼저 지나간 자리에는 흔적이 남는다.

조금 눌린 풀 한 포기, 살짝 드러난 흙길.

그 흔적을 따라가면 처음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당뇨를 먼저 겪은 반려인의 조언들, 조심스레 건넨 이야기들 그 모든 게 나에겐 길이었다.

그 책임을 먼저 껴안은 사람들의 흔적은 막막했던 내 마음에 숨통을 틔워주었고,

나는 그 길을 따라 조금씩 걸어갈 수 있었다.


하루하루 밥을 챙기고, 약을 먹이고,

혈당을 재고, 주사기를 드는 일상.

처음엔 그 모든 게 두려웠다.

작은 주사 바늘 하나에도 손이 떨렸고, 혈당기 숫자 하나에도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괜찮은 수치가 나올까, 또 오르진 않았을까.

그 작은 숫자에 하루의 기분이 휘청거렸다.


콩이 앞에서는 담담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늘 조마조마했다.

혹시 내가 놓친 게 있을까,

더 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렇게 끝없이 스스로를 돌아보며 풀숲을 헤맸다.


하지만 그 두려움도 하루하루 반복하면서 조금씩 풀렸다.

주사 놓는 손은 익숙해졌고, 숫자하나에 크게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걸 마음이 배웠다.

무섭고 낯설었던 길도, 걸어가다 보니 길이 났다.


그리고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그저 일상이다.

밥을 챙기고, 약을 먹이고,혈당을 재고, 주사를 놓는 일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게 되었을 때,

비로소 완전한 길이 난 것 아닐까.


풀은 눌리고, 길은 드러났다.

그 길은 내 발걸음으로 만들어졌고,

내가 걷는 동안 조금 더 단단해졌다.


나는 이제 안다.

누군가 먼저 겪어낸 책임감이 얼마나 큰 위로와 도움이 되는지.

그 길이 있었기에 나는 덜 두려웠고, 덜 외로웠다.

그래서 나도 기꺼이 껴안는다.

내가 걸어낸 이 길이 또 누군가에게 작은 흔적이 되기를.

누군가가 덜 힘들게, 덜 막막하게 이 길을 따라 걸을 수 있기를.


풀숲에도 길이 난다.

사는 일도 그렇다.

처음엔 막막하지만, 하루하루 책임을 껴안으며 걸어가다 보면

그 길 위에 나도 서 있고, 또 누군가가 함께 걷는다.


keyword
이전 09화잘 개어진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