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바라지 않아도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강아지와 인사를 나눈다.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잘 잤어? 쿨쿨 잤어?"
그리고 내 손길에 기지개를 켜는 강아지의 몸짓을 통해밤사이의 안부를 전해 듣는다.
매일 하루는 크게 다르지 않다.
제일 처음 강아지의 밥을 챙기고, 주사와 약을 챙긴다.
습관처럼 손이 움직이지만
그 속에는 내가 선택해 온 책임이 있다.
산책을 나서면
똑같은 길, 익숙한 풍경, 매일 보는 사람들.
강아지는 킁킁거리며 제 할 일을 하고
나는 무심히 피곤한 걸음을 옮긴다.
오늘의 할 일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정리를 한다.
그 순간 바람 한 줄기,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는 풍경인데
괜히 한 걸음 멈추게 되는 순간.
그 틈에서 잠깐 숨을 고른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면 출근 준비로 분주해진다.
일터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 종일 해야 할 일들을 해낸다.
가끔은 가족들이 부탁을 해오고,
때로는 친구나 지인들이 이런저런 부탁을 건넨다.
내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해주는 게 익숙해졌다.
그렇게 하루가 가득 찬다.
일로, 관계로, 책임으로 빽빽해진다.
어쩌면 내 삶이 맞긴 한가 싶은 하루도 있다.
예전 같았으면 숨 막힌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런 게 과연 나를 채우는 건지,
혹은 나를 소모시키는 건지 헷갈렸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안다.
그 모든 걸 해내고 있는 하루 속에서
틈은 스스로 생긴다는 걸.
누가 대신해주지 않아도,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묵묵히 감당한 하루 끝에 문득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정신없는 출근길
차창밖으로 스며드는 빛을 보는 순간,
강아지가 내 옆에 기대어 편히 숨 쉬는 순간,
가족들이 고맙다며 툭 건네는 말 한마디.
그 틈 사이로 스며드는 것들 속에서
나는 괜히 마음이 가득 차는 걸 느낀다.
더 가지려 하지 않아도, 더 특별해지려 하지 않아도
내가 선택해서 해낸 하루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내 삶이다.
그 충만함은 거창한 데서 오지 않는다.
내가 돌보는 일, 책임지는 일,
가끔은 피곤해도 감당해 온 것들 틈 사이로
조용히 스며드는 빛.
그 빛이 내 마음 한구석을 환하게 비춘다.
삶은 그렇게 어디선가 틈을 내고
그 틈 사이로 나에게 말을 건다.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냐”라고.
“오늘 하루 잘 살았다”라고.
그리고 나는 그 한 줌의 빛에 기대어
다시 내일도 내 몫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