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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테이퍼링

by 윤선

여행은 갈 때는 길고, 돌아오는 건 짧다.

사실 여행은 비행기표를 끊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몇 달 전, 비행기와 호텔의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부터 마음은 이미 거기에 가 있다.

그날부터 매일 조금씩 설렌다.

지도도 찾아보고, 맛집 리스트도 만들어보고,

‘얼른 그날이 왔으면’ 하며 디데이를 세어본다.


여행지에 도착하면 그 설렘은 더 커진다.

맛있는 음식과 각국의 여행객들.

며칠 동안은 현실을 잠깐 내려두고,

돈도 시간도, 심지어 뇌도 맡겨두고 마음껏 놀다 온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늘 너무 갑작스럽다.

정신없이 짐을 싸고 공항으로 가서 입국수속을 마치고

비행기에서 눈을 떠보면 어느새 착륙했고,

집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긴 설렘은 너무 쉽게 끝이 나버린다.

짐을 풀고, 세탁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열어보는 그 순간부터 내가 다시 살아야 할 리듬이 고스란히 눈앞에 펼쳐진다.


그때 느껴지는 공허함은 어쩔 수 없다.

몇 달 동안 품고 있었던 설렘이

단 하루 만에 끝나버린 것 같아서.

아쉬움과 허전함이 마음 한편에 자리 잡는다.


나는 그 마음을 확 잘라내는 게 아쉬워서

테이퍼링이라는 방법을 쓴다!

그것은 바로 여행지에서 사 온 빵을 천천히 며칠 동안 먹어가며 마음을 달래는 거다.

빵을 아껴 먹는 건 아니다.

그 빵을 먹으면서, 그 시간들을 하나씩 정리하는 것이다.

몇 달 전부터 시작된 설렘과, 그 짧지만 진했던 며칠을

한 입 한 입,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그리고 또 하나,

여행 중에 모아 온 종이봉투며 비닐봉지도 몽땅 꺼낸다.

사람들은 대부분 다 버릴지 몰라도,

나는 그 봉투들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들여다본다.

‘이건 어디서 뭐 샀더라?

아, 맞다. 그거 산 거였지.’

봉투에 구겨진 자국을 쫙쫙 펴가며

거기에 묻어온 시간들을 다시 떠올린다.


빵을 먹고, 봉투를 정리하고,

그렇게 며칠 동안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을 내 안에서 천천히 정돈해 간다.


첫날엔 아직 마음이 들떠 있어

빵을 베어 물며 그 거리들을 떠올리고,

봉투 속 영수증 하나 꺼내보며 웃는다.

다음날엔 조금 익숙해진 집 안에서

“그래, 이제 일상이지” 하며 현실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빵을 먹는 날,

그제야 마음도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그렇게,

빵과 봉투로 내 마음을 되돌려 놓는다.

억지로 현실에 끌려오지 않고, 내 속도로, 내 방식대로.

그리고 다시, 내 일상으로 돌아와 또 하루를 산다.

다음 설렘이 찾아올 때까지, 그 사이를 잘 살아내기 위해.


이거야 말로 여행의 공허함을 달랠 수 있는 기가 막힌

꿀팁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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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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