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직서는 이미 시로 썼어요
나를 낳고 기르고 지키고 보듬던 곳이 바로 ‘우리 집’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감사히 여길 일이겠지. 그 ‘우리 집’이란 곳에서 내가 편안하고 즐겁고 안도감이 들고 자유롭다면, 그것은 엄청난 행복이자 행운이지 않을까 싶어.
감히 내 어려움을 다른 이들의 삶에 빗대고 싶지 않지만, 간사한 이 마음은 가까운 친척이나 친구, 쉽게 접하는 매체의 ‘우리 집’들을 자꾸 내 ‘우리 집’과 견주곤 했다. 왜 아쉬운 것만 눈에 들어올까? 특히 서로 간 소통의 불화는 내가 오로지 내 방이나 침대 외엔 집이 편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기록에도 남지 않고 공중으로 휘발되는 말들이라고 생각하면 어쩌면 가벼울지 모르지만, 서로 오가는 말들의 온도는 갓 달궈진 인두 같았다. 만일 내가 성당에 다녔다면 고해성사를 매일 다녔겠다. 마음으로 지은 죄가 컸을 거라서. 그 죄가 더 커지기 전 나는 탈출하듯 홀로 집을 나왔다.
그날은 한글날이었고 정말 날씨가 청명했다.
독립 이전부터 내게 또 다른 ‘우리 집’은 언제나 여행지였다. 여행지는 목적 자체가 새로운 것들을 경험하고 감상하고 휴식하는 곳으로, 그곳에서는 내가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지에서는 일정을 촘촘히 계획하고,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움직이던 성격이라 짧은 기간에도 여행지에서의 시간은 빈틈이 없었고, 그만큼 지칠 새도 없었다. 몸은 피곤해도 새로움으로 채워지는 심적인 에너지는 유독 충만했던 것 같다. 다만, 가족과 간 여행지에서만큼은 그 자유로움을 온전히 느낄 수 없었기에, 내게는 ‘우리 집’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독립 후 얼마 안 가 코로나를 겪으며 홀로 또는 친구와 함께 떠나던 여행은 차츰 줄어들었고, 먼 여행지에서 느끼던 자유는 점점 희미해졌다. 대신 그 기억을 채운 것은 혼자 하는 운전이었다. 차가 없어서 대부분 차량 공유 서비스를 통해 짧게 빌린 차였지만, 늦은 밤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서며 드라이브하는 시간은 내게 또 하나의 평화가 되어 주었다. 길 위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내 생각을 소리 내어 정리할 때면 그 순간의 차 안이야말로 나만의 또 다른 ‘우리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