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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May 17. 2024

8. 내 마음 지키기

문제는 나에게 무엇이 성공이고 행복인지 정의하지 못할 때 생긴다.

"저 결혼합니다~."


친척들이 모여 있는 단톡방이 오랜만에 울렸다. 외가의 내 바로 아래 동생이다. 내 바로 아래이지만 나이는 10살인가? 꽤 차이가 난다. 내가 똥기저귀도 갈아주고 했던 동생인데 결혼한다니, 기특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시간이 참 이렇게나 흘렀구나. 오래 만나왔던 남자친구가 있다고는 들었는데 저번에 만났을 때 만해도 "결혼은 나중에!"라고 외치더니 어른들께 서로 인사드리고 나니 일이 생각보다 빨리 진행되었나 보다. 역시 결혼에 있어 '어른들의 개입'은 모든 걸 속전속결로 만드는 묘한 재주가 있다.


우리 친가, 외가는 자손들이 많기도 한데 그 자손들이 신기하게도 모두 일찍 결혼을 했다. 보통 20대 후반, 늦어도 30대 초반에는 다들 결혼을 했다. 그러다 보니 41살인 내가 여전히 싱글로 있는 것이 돌연변이처럼 보인다. 친척들 모임에 가면 뭔가 나만 따로 노는 이방인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옆에 각자의 배우자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 형태를 갖추고 있다 보니 식사 자리에서 난 어디에 앉아야 하나 난감할 때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요새는 친척들 모임에 이 핑계 저 핑계 둘러대며 불참하고 그런 나를 엄마는 '넉넉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동생의 카톡을 처음 읽은 사람이 하필이면 나였다. 날짜까지 받아놓은 거 보니 정말 많이 진전된 거 같았고 신혼집도 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어딘가 모르게 물컹거렸다.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도 되는 메시지라 참 다행이었고 텍스트로 축하인사를 한가득 담아 보냈다. 너무 축하하면서 동시에 너무 착잡해지는 이 기분은 대체 뭐람...


벌써부터 결혼식에 혼자 덩그러니 있을 내 모습부터 상상되고, 그런 나를 '어여삐 불쌍히' 볼 엄마의 눈빛도 그려진다. 친구들에게 착잡해진 마음을 끌어안고 이런저런 하소연도 하고 답 없는 질문들을 난사했으며 역시나 위로-공감-응원-수다라는 같은 패턴의 대화가 이어졌다. 아무도 날 보지도 나에게 관심도 갖지 않을 남의 결혼식에서 난 무엇 때문에 혼자 자기 연민에 빠진 상상부터 하고 있는지 한심했다. 진심으로 멋있게 축하해 주고 축의금도 거하게 주는 '유일한 싱글' 친척언니가 되고 싶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 마음 지키기에 집중해 보자.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났다.

"하나님이 결혼한 사람들은 혼자두면 너무 못 참아하니까 결혼을 시키신 거고, 결혼 안 한 사람들은 혼자 둬도 잘 참을 수 있으니까 안 시키신 거야. 우리는 참을만한 애들인 거지. 그러니 우리는 대단한 애들인 거야."

어이없기도 웃기기도 했지만 명쾌했다. 그래. 이 거센 풍랑 속에서도 혼자 잘 버티고 있는 내가 대단하다.


혼자라서 좋은 것도 많다.

제일 좋은 건 아무래도 내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다는 것. 퇴근 후에는 특별한 게 없다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 저녁을 먹기 싫음 안 차려도 되고 술 한잔하고 싶으면 술 마셔도 된다. 자고 싶음 자도 되고 청소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들어도 되고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도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쓸 때 주변에서 건드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집중도 잘되고 이러다 힘들면 그냥 바닥에 대자로 누워서 휴대폰 보며 거실을 데굴데굴 굴러다녀도 된다. 아직도 안 씻고 뭐 하냐고 들어가서 자라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넓은 침대에 대각선으로 누워도 되고, 이불도 하나만 쓰고 그걸 나 혼자만 덮어도 되고, 갑자기 하늘자전거 하면서 팅팅 부은 다리를 가라앉혀도 된다. 모든 게 (이 집에서만큼은) 내 마음이다.


휴가도 내가 가고 싶은 곳 아무 데나 내가 가고 싶을 때 아무 때나 갈 수 있고 (물론 직장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된다. 친구들과 약속도 자유롭게 잡을 수 있고 물론 이것도, 가정이 있는 친구들이다 보니 내가 거의 맞춰야 하는 모양새이지만 어쨌든 난 약속 잡기에서는 매우 자유롭다. 한밤중에 영화 보러 가고 싶으면 그냥 차 타고 나가면 되고 잠 안 오면 일어나서 넷플릭스를 봐도 된다. 좋은 게 참 많다.


쓰다 보니,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결혼해도 좋겠지만 안 해도 좋다. 해서 좋은 게 있을 것이고 안 해서 좋은 게 있을 것이다.

난 아직 '안 해서 좋은 것들'을 누리고 있는 것이며, 가까운 미래에 '해서 좋은 것들'을 누릴 수도 있고 평생 못 누릴 수도 있겠지만 괜찮다. 남들이 '안 해서 못 누린 좋은 것들'을 아주 잘 누리고 가는 것이니 그걸로 내 인생 만족한다.


동생 결혼식에 입고 갈 예쁜 옷을 사야겠다. 좋은 옷을 살 아주 좋은 기회이고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신발도 사볼까. 가방도 사볼까. 이런 거 사도 눈치 안 봐도 되고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 내 돈 내가 쓰는 거니까.

기분이 또 좋아진다.


이 정도면 내 마음 지키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 같다.




오히려 문제는 자기에게 무엇이 성공이고 행복인지 정의하지 못할 때 생긴다.

그러면 이 사람의 행복, 저 사람의 성공에 휘둘리게 된다.

인생에서 너무 많은 걸 기대하지 마. 그럼 지금이 불행해져.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뜨겁게 살아가라. 나는 그런 너를 항상 응원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끼고 사랑해야 할 사람은 너 자신이다.

- 책 '벌써 마흔이 된 딸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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