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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May 24. 2024

9. 언니, 그거 욕구불만이야

채울 수 없다면 완벽하게 비워보고 싶다.

12년 전, 더블린에서 함께 지냈던 동생이 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지만 인생의 쓴맛을 다 경험해 본 것 같은 포스와 그 어디에서도 기죽지 않는 걸크러쉬 성격, 그리고 내가 모르는 '세상' 이야기를 정말 재밌게 해 줬던 언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그런 동생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시내 한 펍으로 들어갔고 그날은 특별히 피자도 함께 주문했다. 여자 둘이서 피자 한 판을 4조각씩 나눠 먹으면 배불러야 하는 게 맞는데, 어쩐지 그날은 4조각을 먹어도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 요새 이상해. 진짜 먹어도 먹어도 뭔가 계속 배고파. 나 요새 누텔라를 식빵에 엄청 발라 먹고 시리얼도 막 두 그릇 먹고 그래. 그리고 저번에 산 냉동감자튀김 벌써 다 먹었어."

"언니 그거 알아요? 식욕이랑 성욕이랑 비례하는 거. 언니 그거 욕구불만일 수 있어. ㅋㅋㅋ "

"............."


살다 살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동생이 말하는 '욕구불만에 대한 설명'은 내게 약간 충격적이라 12년 전 대화인데도 이렇게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그런데 이제와 그게 지금 왜 기억이 나냐면,


내가 요새 그렇다. 먹어도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이 욕구. 먹으면 금방 배부르고 돌아서면 또 먹고 싶어지는 이 욕구. 배도 안 고프면서 계속 뭔가 먹고 싶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난 계속 먹고 있다.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음식들만 먹고 있다. 언니가 원래 몸에 좋은 음식들은 당기는 법이 없다는데 맞는 말이다. 온갖 잡다한 정크푸드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혹시 회충이 있는 거 아닐까? 생각하다가 난,

'그래서 뭐야... 나 진짜 이거 욕구불만이야? 아 뭐야 진짜...'

라고 나 자신에게 계속 되뇌어 물어보았다. 그러나 욕구불만은 맞는데 동생이 말하던 욕구불만이 아니라 정말 순전히 식욕이 제대로 채워지지 않는데서 온 불만이 확실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책을 읽는데 별안간 고명이 아주 예쁘게 올라간 잔치국수가 떠오르고, 미드를 보고 있으면 그들이 먹는 햄버거에 나의 침샘이 폭발한다. 최근에는 넷플릭스 "The 8 show"를 보았는데 거기서 류준열 배우가 진미채를 먹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츄릅 했다. 그 긴 에피소드에서 진미채가 머리에 박혔다면... 맞다.


진미채볶음은 그 매콤 달콤 짭조름한 양념과 잘근잘근 씹는 맛이 다인, 밥과 함께 아니 밥이 없어도 끊임없이 입에 들어가는 나의 최애반찬이나 오징어를 못 씹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카레는 착색 때문에,

삼겹살은 상추에 싸서 파채도 듬뿍 올려 한입에 크게 앙 하고 먹는 맛인데 상추쌈은커녕 고기를 가위로 잘게 잘라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한 입 앙 베어 물어 그 안의 모든 내용물의 맛을 한 번에 같이 느껴야 제맛인 햄버거도 나이프로 조각조각 잘라서 먹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을 '제때' '제대로' 못 먹었기 때문에,


욕구불만이 생겨버린 게 아닐까,

안 그래도 먹는 걸 좋아하는 내 안에 그간 누적된 불만이 또 터져버린 것 같다. 교정했던 사람들은 다들 하나같이 "난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난 그냥 웬만한 건 다 먹었어."라고들 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나이 들어 교정을 하면 (사람처럼) 치아가 말을 안 듣는다는 원장님의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다들 웬만하면 잘 안 빠진다는 스크루도 이미 두 번이나 빠져 다시 박기 위해 잇몸 재생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리하여 난 먹는 종류를 더 한정 지으며 몸을 더 사려왔다.


그러나 욕구해소, 정신건강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이렇게 계속 먹다간 돼지가 될 것이다. 아니 돼지도 배부르면 더 이상 안 먹는다고 했다.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다.

마흔이 넘으니 내외적으로 자잘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일단 외적으로는 상당히 떨어져 가는 체력과 푸석해지는 피부에 늘어가는 주름, 무엇보다 안 먹으면 안 빠지고 먹으면 찌는 나잇살이 붙는다는 것.

나이+살=이건 정말 최악.


돈가스 생각하지 마.

그러나 돈가스만 생각난다.

이렇게 계속 먹는 것에 집착하면 돼지가 되는 건 순식간, 아니 돼지만도 못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내가 살이 쪘는지 안 쪘는지를 알려주는 바지가 하나 있는데 요새 나의 먹는 모양새를 보면 분명하다. 체중계에는 감히 올라가 보지도 않았다. 옷방에 가서 그 바지를 꺼내 입어봤다.


아.... 씨....


먹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이 나쁜 나트륨, 탄수화물 덩어리들! 이 나쁜 칼로리 폭탄들!

집이 11층이니까, 지금 당장 계단 오르기라도 좀 하고 오도록 하자.

그리고 주말에 등산하자. 내 안에 가득한 독소를 빼야겠다. 오랜만에 하는 등산이니 체력을 생각해서 난이도는 상은 안 되겠고 독소배출을 위해 중상 코스를 가보자. 같이 가주는 친구에게는 난이도 하라고 뻥쳤다. 산책로 같다면서 왜 스틱을 챙겨야 하냐고 묻지만 다행히 검색하는 것도 귀찮아하는 친구라 그저 그냥 너 가는 대로 가겠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다. 그리고 하산한 뒤에는 채소 가득한 건강식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은 아주 꿀처럼 달콤한 질 좋은 수면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몸이 힘들면 마음은 편해질 것이다. 

제발 이 모든 계획이 성공적이길.

일시적 성공이 아닌 궁극적 승리가 되길.


이 식욕이 잠시 떨어졌다가 최근 도진건,

아무거나 다 사고 싶었던 '구매욕'이 떨어지고 난 뒤부터였다.

온갖 욕구들이 내 안에서 염증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터지고 있는 느낌이다.


왜 이렇게 모든 게 극단적이 되어가나 모르겠으나

그 어떤 욕구도 다 이겨버릴 거다.

그 어떤 욕구도 다스릴 줄 아는 참된 인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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