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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e May 31. 2024

10. 저도 잘해보려고 그런 거예요.

그저 횡설수설하며...

20대 시절에 그려본 나의 40대는

당연히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있을 것이라는

아이도 두 명은 낳았을 것이라는

팍팍한 회사생활일지라도 안정적인 가정생활은 하고 있을 것이라는

경제적으로 풍족한 여유는 아니더라도 쪼들리지는 않게 살고 있을 것이라는


기대.


지금 나의 40대는

이 나이까지 이뤄놓은 게 대체 뭐냐, 글쎄…

집은 있냐, 없다. 돈은 얼마나 모아놓았냐, 아주 조금.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지만 내가 나에게 던지는 질문들.

결혼이라... 아이 둘은커녕 결혼도 안 할 것 같고

결혼했냐는 질문에 이제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비혼입니다.라고 대답하는


현실.


나 신경질 나 죽겠어. 이젠 남자 때문에 울 일 없을 줄 알았는데 서른이 되면 안 그럴 줄 알았어.
가슴 두근거릴 일도 없고, 전화 기다리면서 밤새울 일도 없고,
그게 얼마나 힘든 건데, 나 좋다는 남자 만나서 내 마음 안 다치게 그렇게 살고 싶었단 말이야.
근데 이게 뭐야 끔찍해. 그렇게 겪고 또 누굴 좋아하는 내가 끔찍해 죽겠어.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좋겠어 아부지.
-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중에서


(잠깐만. 이렇게 말하는 삼순이는 고작 30세. 지금 생각해 보니 극 중 남자 하나 제대로 만나기 어렵다는 30세 여자에게 27세 재벌 꽃미남이 들이대는 이 설정은 정말 가관이기도 하고, 30세의 여자를 남자 하나 제대로 만나기 너무 어려운 노처녀로 그리는 설정도 가관이기도 하고... 그러나 정말 당시 나의 최고의 드라마였다.)


나도 40이 되면 심장이 딱딱해졌으면 했다.

삼순이는 연애감정에도 휘둘리지 않는 딱딱함을 원하는 거였다면,

나는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지 않고 사소한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강인함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물러지고 더 약해졌다. 자신감은 줄어들고 자괴감은 증가한다.

나보고 참 씩씩하다고도 하고 혼자 이것저것 잘한다고 야무지다고도 한다.

씩씩해 보이는 건 전혀 그렇지 않은 날 들키기 싫어서 그래 보이려고 연기하는 것뿐이고

혼자 이것저것 잘하는 건 대신해 줄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하는 것뿐이다.


여행을 할 때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내 계획하에 움직여졌다. 먹는 것만 조금 계획에서 벗어날 뿐 거의 내가 미리 짜 놓은 계획표대로 행해졌다. 또한 모든 물건은 원래 있던 자리에 있어야 한다. 바닥에 머리카락은 용납할 수 없다. 청소를 하면 넓지도 않은 집을 3시간이나 한 적이 있다. 한 번은 화장실 벽을 청소하는 걸 보고 친구가 대체 뭐 하냐고 물었었다. 난 굉장히 계획적이고 깔끔한 성격이라며 자부했다. 그러나 내가 자부했던 그 성격이 날 너무 힘들게 했다. 일할 때 계획에서 벗어나면 스트레스를 두 팔 벌려 한가득 받았고 바닥에 머리카락이 하나 보이면 청소를 해야 하는데 몸이 힘드니 청소하기 싫고 청소를 안 하니 그 머리카락이 나에게 스트레스를 뿌려대는 것. 그저 소소한(?) 결벽증인줄 알았는데 전문가로부터 강박증으로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 후에 심리학 서적을 읽으면서 그런 강박적인 성향이 식이장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 몸에 대한 왜곡된 인식뿐 아니라 외로움이나 현실에 대한 불만족 역시 식이장애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마음을 채울 수 없어서 입이라도 채우고 싶은 거였구나.
-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중에서


아... 나의 불타오르던 식욕이 몸과 마음이 아픈 데서 온 신호였을지도 모르겠다.

식욕을 잠재우러, 식욕으로 인해 차오른 살을 다스리러 지난주에 산에 다녀왔다. 생각보다 험난했고 심지어 자빠지기까지 해서 멍도 심하게 들고 온몸이 쑤셨다. 정상까지 올라갔다오니 기분은 좋았다. 그러나 일시적인 성공이었을 뿐 궁극적인 승리가 되지 못했다.


난 그저 잘해보려고 한 것 뿐인데…

손만 대면 모든 것이 돌이 되어 버리는 것 같은 마이너스의 손을 가진 나에게 결국 무기력증이 왔다.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을 참 싫어했는데 요즘은 진짜 이렇게 살아야 하나 싶기도 하다. 일본에서는 특히 5월에 무기력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아 오월병이라고도 부른다는데 정말 5월이라 이러는 건가... 다행이다 내일이 5월 31일이라서. 6월이 되면 나도 괜찮아질까?


나는 '정신으로 몸을 극복한다.'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몸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다. 단지 겪어낼 뿐. 내 마음과 육체를 싸워서 이겨야 할 경쟁자가 아니라 보듬어서 함께 가는 친구일 수밖에 없다.
- 책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 중에서


그러나

난 지금 이 신호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내 마음과 몸을 어떻게 보듬어 줘야 할지

너무 모르겠어서 난감하다.

미국에서 온 똑똑한 타일러가 알려주었다.

무기력증이 오면 심박수를 올려보라고.

지난주와는 다른 이유로 11층인 계단을 오르고 동네를 40분간 경보했다.

심박수를 끌어올려 글을 겨우 썼고 겨우 마친다.


횡설수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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