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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란도란 Dec 03. 2024

[번외 편] 도라이와 구라, 그리고 보름달

<말 새끼들 이야기>


겨울 방학을 하자마자 혜원은 큰 가방 하나를 짊어지고 고수임 여사를 찾아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말 새끼 1호, 2호, 3호, 5호까지 함께 왔다. 모두 한 짐 짊어지고 온 걸로 보아 한동안 머물다 갈 요량으로 보였다. 그때부터였다. 말 새끼들은 방학만 하면 고수임 여사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리고 고수임 여사의 옷을 입고 동네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말 새끼들은 고수임 여사의 옷이 화려하면서도 편하다는 걸 재빠르게 눈치챈 것이다. 한번 맛본 편안함과 재미에 이들은 빠져들었다. 할머니들이 일바지로 즐겨 입는 몸뻬의 편안함을 따라올 옷은 없다. 피부를 한들한들 보드랍게 스치는 옷의 촉감도 한몫했다. 말 새끼들은 대학생이 되어서도 몰려왔다. 달라진  있다면 머무는 기간이 짧아졌단 것뿐이다.      


고수임 여사의 동네 향리골은 추석 때마다 마을 회관에서 노래자랑을 열었다. 작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노래자랑의 규모가 상당했다. 나름 성공했다 하는 자녀들의 돈 자랑이기도 했다. 고수임 여사의 아들, 딸들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찬조 물품을 냈다. 게다가 매년 봄마다 요리사인 첫째 사위가 마을회관에 찾아와 짜장, 짬뽕, 탕수육을 즉석에서 만들어 동네 어르신들에게 거하게 대접하고 갔다. 또 막내딸은 미용실을 해서 자주 와서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의 머리를 손질해 드리고 갔다.   

 

올해 추석의 1등 상품은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은 32인치 LCD 평면 텔레비전이었다. 이장댁 둘째 아들이 골드스타에 다니고 있는데 노래자랑 상품으로 떡하니 기증한 것이었다. 원래도 떡 벌어진 어깨의 이장은 이날은 더 기고만장하여 고개를 좀체 수그릴 줄 몰랐다. 보나 마나 다음 이장 투표에서도 몰표를 가져올 터였다.


2등 상품은 16kg 통돌이 세탁기였다. 한때 골드스타의 라이벌이었으나 한물간 대성전자 제품이었다. 밤나무골 김 씨의 장남이 기증했다. 3등 상품은 1등, 2등 상품에 비해 한참 뒤떨어졌는데 믹서기였다. 그리고 인기상은 라면 한 박스였다. 인기 없는 브랜드의 라면이었다.


고수임 여사텔레비전은 산 지 20년은 족히 되었다. 말 새끼들은 기필코 1등을 하고 말겠다고 결의를 다졌다. 말 새끼 1호부터 4호까지 모여 전략을 짜고 있었다. 넷이 각각 개인으로 나갈 것인지, 팀으로 나갈 것인지 고심했다.


  “진또, 우린 팀으로 나가자. 팀명은 도라이와 구라 어때?”


말 새끼 2호 진도희가 말했다. 그녀의 별명은 구라다. 진구라로 불렸다. 말 새끼 4호 진혜원은 자칭, 타칭 돌+아이다. 동네에선 진또라 불렸다. 진혜원이 안광을 희번덕이며 말했다.


  "좋았어. 1등은 우리 거야!"


  “난 혼자 나갈 거야. 형도 혼자 나갈 거지?”


말 새끼 3호 진영원이다. 그는 기생오라비처럼 생겼다. 반반한 얼굴로 학창 시절 내내 여자들을 후리고 다녔다. 노래방을 학교처럼 다녔기에 말 새끼들 중에서 단연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 압도적이라 보면 된다.


  “당연하지. 우린 각자 나가자!”


진도준, 말 새끼 1호다. 그는 육각수의 ‘흥부가 기가 막혀’를 부르기로 이미 결정했다. 노래 실력은 넷 중에 제일 떨어진다. 아무도 그에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 버리는 패다.


  “아 헤야라 품바라 품바라 품바라 해야~”


진도준은 다리를 촐랑이며 노래 연습을 했다. 진영원은 임재범의 ‘고해’를 부르겠단다. 동갑내기인 진도희가 격렬하게 반대했다.


  “야, 무슨 고해를 불러? 제정신이야? 심사위원을 봐봐.”


노래자랑 무대 옆에는 흰 천을 두른 긴 책상이 놓여 있었다. 노인회장, 이장, 부녀회장, 청년 회장이라 적힌 푯말이 보였다. 청년회장조차도 얼핏 봐도 40대였다. 혜원이 생각해도 고해는 아닌 것 같았다. 진영원에게 말했다.  


  “고해는 노래방 가서 여자애들 앞에서나 불러. 오빠는 <DOC와 춤을> 불러. 그게 이 분위기에 딱이야.”


  “싫어. 내가 여기 있는 여자들 마음 모조리 빼앗는다. 여심 저격 진영원, 두고 봐.”


  "그 차림으로 잘도 여심 저격하겠다."  


진도희는 진영원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 말이다. 진도희와 진혜원은 팀으로 나가야 하는데 의견이 좀체 좁혀지지 않았다. 진혜원은 지금은 테크노의 시대이며 아무리 시골이라도 시대에 뒤떨어져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테크노 여전사인 이정현의 ‘바꿔’를 부르자고 했다. 진도희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그 노래 시작이 <모두 제정신이 아니야 다들 미쳐가고만 있어>란 건 알지? 다음 가사도 만만찮고. 여기 분위기랑 안 어울려. 여기는 트로트야. 무조건 트로트를 불러야 해. 우리 옷 봐라. 이 옷으론 트로트가 딱이야.”


진혜원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잠시 잊고 있었다. 고수임 여사의 옷이었다. 잔 꽃무늬의 하늘하늘한 상의에 흰 국화가 큼지막하게 프린팅 된 빨간 몸뻬 차림이다. 거기에다 대나무로 만든 삿갓도 쓰고 있었다. 진혜원뿐만 아니라 말 새끼들 모두 고수임 여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진도희와 진혜원은 한참의 실랑이 끝에 참가 신청서를 썼다. 노트에 팀명과 노래 제목만 적으면 되었다.


도라이와 구라
인순이의 ‘밤이면 밤마다’


둘은 막춤을 추기로 했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 아래에서 신나게 놀자고 했다. 진혜원은 밤마다 나이트에서 갈고닦은 춤 실력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할머니, 텔레비전 바꿔 줄게.'


진혜원은 고수임 여사에게 32인치 LCD 평면 텔레비전을 안겨 드리리라 다짐했다. 말 새끼 넷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옷이 진지하지 못했을 뿐! 그날 그 무대 아래에서 진혜원을 지켜보던 두 남자가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첫사랑이었고, 또 다른 이는 기억 속에서 잊었던 사람이다. 진혜원은 고수임 여사의 화려한 옷을 입고 보름달을 조명 삼아 무아지경으로 막춤을 추었다.


훗날 진혜원은 이날을 회고하며 노래방에 갈 때면 '밤이면 밤마다'를 개사하여 불렀다.  


외로운 밤이면 밤마다
내 모습 떠올리긴 싫어
휘영청 보름달 밑에서
내 모습 미쳤던 것 같아
싫어
휘영청 보름달 저 새끼
내 맘 알까 몰라
멀리 떠나간 내 님은
혹시 날 잊어버려라



      사진: UnsplashAlexander Andrews



이날 임재범의 '고해'를 부른 말 새끼 3호, 진영원은 2등을 했다. 대성전자의 16kg 통돌이 세탁기를 고수임 여사에게 선물했다. 진영원은 동네 할머니들의 마음을 저격했다. 진영원이 2등으로 호명되자 할머니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도라이와 구라 팀은 인기상을 받았고 상품으로 라면 한 박스를 받았다. 1등을 한 사람은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불렀다. 모두들 초대가수로 최백호가 온 줄 알았다. 작은 시골 마을의 노래자랑도 철저하게 가창력을 보았다 한다.


말 새끼들은 그렇게 내년 추석 노래자랑을 기약하기로 했다.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번외 편 세 편까지 모두 끝났습니다. 계획대로 다음 주 12월 10일 화요일, 새로운 브런치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어제 손목을 다쳐 깁스를 했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왼손입니다.

오른손잡이라 글은 쓸 수 있습니다!!!

씻기도 어려워 외출이 힘드니 집에서 얌전히 글만 쓰렵니다. 얌전한 글로 다시 나타나겠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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