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양혜은 씨
<소설 창작> 수업은 두 번째 시간부터 과제가 시작되었다. 그날은 소설 구성의 3요소를 배웠다. 소설은 인물, 사건, 배경이 있어야 한다. 이 요소는 소설의 기본 틀을 이루며 작품의 주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선생님이 수업을 마무리하며 말했다.
“이론을 다 배워도 직접 써보는 것만 못 합니다. 이 강의는 소설 창작이고 여러분은 분기마다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해야 합니다. 앞으로 매시간 과제가 있을 겁니다. 다음 시간까지 자신이 쓸 소설의 인물, 사건, 배경을 작성해 오세요.”
한 수강생이 선생님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겨우 두 번째 시간인걸요. 배운 거라곤 지난 시간에 배운 소설의 소재와 주제 찾는 법, 오늘 배운 소설 구성의 3 요소가 다인데 어떻게 갑자기 글을 쓰나요?”
선생님이 답했다.
“갑자기 쓰는 것도 글을 쓰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영감이라고 다들 들어 보셨죠? 지난 시간에도 얘기했지만 소설의 소재는 여러분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쓰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쓸 이야기는 넘쳐납니다. 여러분은 그걸 낚기만 하면 되죠. 멀리서 찾지 말고 자신의 주변부터 찾으세요. 정 못 쓰겠으면 자기 이야기를 써와도 좋습니다. 그럼 이만 마칩니다. 다음 시간에는 소설의 시점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선생님이 강의실을 나가고 곳곳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큰일이다. 뭘 쓰지? 난 다음 시간부터 나오지 말까 봐.”
“그냥 일기나 써. 인물, 사건, 배경만 있음 된다잖아.”
“매 시간 과제 있다는데 나도 이쯤에서 그만둘까 봐.”
나는 잘하고 싶다. 소설 창작을 꼭 배워보고 싶었고, 선생님의 등단작을 읽고 적잖이 충격받았다. 선생님은 20여 년 전에 한 지역 신문사의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자신의 어린 시절 꿈을 모티프로 한 단편소설이었는데 기이하면서도 환상적이었다. 결말에서 다음 이야기가 꼭 이어질 것만 같은데, 이어진다면 어떻게 전개될까 매우 궁금했다.
이 강의를 수강 신청하기 전에 선생님의 작품을 도서관에서 모두 찾아 읽었다. 자전적 소설이니 뒷 이야기가 혹여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진 않을까 해서였다. 선생님은 등단 이후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작품을 출간했고, 나는 상당 시간을 소설만 읽었다. 다른 작품에서 뒷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언젠가 선생님에게 꼭 물어보리라 다짐했다. 주인공은 대체 그 뒤로 어떻게 되느냐고.
그나저나 무얼 쓸까. 일기라도 써야 할까.
습작이지만 첫 소설이니 잘 쓰고 싶었고 고민만 하다 5일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틀 뒤면 과제를 가져가야 하는데 걱정이었다. 오늘은 오전에 어반 스케치 수업도 가야 했다. 이번 주는 쉬고 소설 과제만 생각할까 했지만 오히려 생각이 많을 때는 한번 싹 걷어내는 것도 좋다. 그림은 생각 걷어내기에 그만이었다. 지난 시간부터 돌이랑 바위를 그리는데 그리다 보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혜은 씨, 무슨 고민 있어? 통 못 잔 얼굴이야.”
장하리 아줌마였다.
“저 못 잔 거 티나요? 실은 해야 할 과제가 있는데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아요.”
“내가 밤잠 안 자는 사춘기 애들을 둘이나 키우잖아. 딱 보면 척이지. 무슨 과제길래 그래?”
“여기 문화교실에서 소설 창작 수업도 듣는데요. 내일까지 인물, 사건, 배경을 써 가야 해요. 근데 뭘 쓸지 모르겠어요.”
김순임 할머니가 말했다.
“그걸 뭘 고민해. 우리가 그간 나눈 얘기 쓰면 되겠구만. 소설도 다 사람 사는 이야기잖어.”
장하리 아줌마가 맞장구를 쳤다.
“그러네요. 고민할 것도 없네. 낙원동 주민센터 문화교실 이야기 쓰면 되겠네. 여기 사람이 얼마나 많아. 이야기는 넘치지.”
“제가 여기서 들은 얘기 다 써도 돼요?”
“그럼. 내 얘긴 다 써도 돼. 실명 써도 돼. 난 장하리로 등장하게 해주라.”
장하리 아줌마가 웃으며 말했다. 김순임 할머니와 박봉수 할아버지도 이어 말했다.
“우리 얘기도 써. 다 기억하남? 못 하면 또 해줄 수도 있어. 어디서부터 해줄까?”
내 옆에 앉아 있는 정이만 아저씨만 조용했다. 다들 안 그런 척하면서 정이만 아저씨의 눈치를 보았다. 아저씨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 그림을 보았다. 돌과 바위가 입체적이다. 음영을 잘 넣어서 그렇다. 아저씨는 그림에 타고난 소질이 있는 듯하다. 감탄하며 보고 있는데 아저씨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말했다.
“내 이야기도 혜은 학생 소설에 꼭 넣어 줘요. 조금만 기다려주면 얘기해 줄게요. 아직은 비밀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이만 아저씨도 제 소설 속 인물 소개에 넣을게요.”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우리 이야기 소설로 나오는 거야? 난 혜은 씨 1호 팬 할게. 책 나오면 싸인 제일 먼저 해 줘.”
장하리 아줌마는 신이 나 보였다.
“이건 연습이에요. 아직 멀었어요.”
내가 손사래를 치자 박봉수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작이 반이지. 이미 반 왔어.”
나는 소설의 제목을 정했다.
시작, 낙원동 주민센터
이 소설의 배경은 낙원동 주민센터 문화교실이다.
등장인물은 박봉수, 김순임, 정이만, 장하리, 양혜은이다. 나는 이곳에 시작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내가 소설에 대해 배운 것은 소재와 주제 찾는 법, 소설 구성의 3요소뿐이다. 그렇지만 쓴다. 시작하면 나아갈 수 있다. 노트북을 켜고 하얀 창을 마주했다. 깜박이는 커서를 보자 두근두근했다. 커서는 라틴어로 '달리는 자', '실행하는 자'를 말한다. 나는 자판 위에 두 손을 살포시 올렸다.
토독토독
글자가 달린다. 나의 소설은 시작되었다.